문곡 김수항의 풍옥정기〔風玉亭記

대나무에게서 바람의 맑음을 가져다 번뇌를 씻고, 옥(玉)에다 비할 만한 덕을 취해 진덕수업(進德修業)의 법도로 삼고자 한다

2024-09-06     김창오
죽림정 내부 상단에 걸려 있는 문곡 김수항이 쓴 죽림정기와 죽림정 편액 - 제2차 예송에서 남인에게 패한 김수항은 1675년 7월 영암으로 유배되었으며, 처음에는 영암읍 서쪽에 살면서 ‘풍옥정’이라는 대나무 정자를 짓고 은거했다. 그러다 나중에 죽림공 현징과 안용당 조경찬의 도움으로 구림마을에 와서 살게 되었다. 풍옥정기를 들여다보면 문곡이 가진 풍모와 기개를 짐작해볼 수 있다.

  문곡 김수항의 영암 유배를 불러온 예송 논쟁 
예송논쟁(禮訟論爭)은 성리학의 예법에 관한 논란으로, 논쟁의 주제는 “왕이나 왕비가 죽었을 때, 어머니나 시어머니인 대비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는 것이 알맞은가?”였다. 예송논쟁은 효종상(喪)인 기해예송(1차)과 인선왕후상(喪)인 갑인예송(2차)으로 두 차례 전개되었다.

예송 논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서인과 남인이 기본적으로 서로의 학문적 입장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상호 비판적인 공존 체제를 이루어 나갔다. 이러한 건전한 공존의 붕당 정치는 예송 논쟁을 기점으로 무너지고, 서인과 남인 사이의 대립은 격화된다. 이러한 대립의 격화는 훗날, 숙종 때에 환국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기사환국(1689년) 때 결국 송시열과 김수항은 남인에게 패하여 사약을 받고 말았다. 

 서인 승리로 끝난 제1차 예송 
제1차 예송이라고도 하는 기해예송(己亥禮訟)은 1659년 인조의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오른 효종이 죽자 그 의붓어머니인 조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를 두고 일어났다. 

송시열과 김수항을 비롯한 서인은 효종이 조대비의 둘째 아들이므로 성리학의 예법에 따라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자가 정리한 ‘가정에서 지켜야 할 예법(주자가례)’에는 장자가 죽었을 경우, 부모는 3년 동안 장례의 예를 갖춰야 하고, 차남 이하는 1년간 해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남인은 효종이 비록 둘째 아들이지만 임금이 되었으므로 장남과 같이 대우하여 3년(만 2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맞섰다. 결국 조대비가 상복을 입는 기간은 1년으로 결정되었고, 논쟁에서 승리한 서인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았다. 

남인 승리로 끝난 제2차 예송 
그 후 1674년(현종 15년) 효종의 비(妃) 효숙왕대비(孝肅王大妃, 인선왕후)가 죽자, 한동안 금지되었던 예송이 재연되었는데, 이 사건이 제2차 예송이라고도 하는 갑인예송(甲寅禮訟)이다. 

두 번째 논쟁은 효종의 아들이었던 현종이 임금이 된 후에 효종의 왕비였던 인선왕후가 죽자 시어머니인 조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벌어졌다. 주자가례에는 첫째 며느리의 경우는 1년, 둘째 며느리에게는 9개월간 장례의 예를 치르도록 하고 있다. 

서인은 인선왕후가 조대비의 둘째 며느리이므로 성리학의 예법에 따라 9개월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남인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효종이 둘째 아들이라도 임금이 되었으므로 장자로 대우해야 하며, 인선왕후에게도 장자의 며느리에 해당하는 예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에서는 조대비가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논쟁에서 승리한 남인과 이에 동조한 세력이 권력을 잡았다.

김수항의 풍옥정 기문〔風玉亭記〕
내가 낭주(朗州 전라도 영암)로 유배되어 성의 서쪽 군리(郡吏)의 집에 잠시 거처하게 되었다. 이 집은 본래 동쪽을 바라보고 서쪽을 등졌으니 아침이나 저녁에도 햇빛을 받았다. 그런데 또 낮은 서까래와 짧은 처마에다 담장과 사립이 폭 뒤덮여, 여름이면 폭염이 아주 심하고 바람마저 들어올 곳이 없었다. 이 때문에 늘 답답해서 마치 시루 속에 들어앉아 있는 양 고생스러웠다.

   낭주군은 예로부터 명승지로 알려졌으니, 경내를 빙 둘러 바위틈의 절이나 물가의 정자가 있어 더위를 씻으며 납량하기에 마땅한 곳이 참으로 없지도 않다. 그러나 나는 바야흐로 두문불출하며 그림자도 감추느라 발은 문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 보질 않았으니, 도리어 난데없이 찾아가기보다는 차가운 수정이나 가을 고채만을 한갓 부러워할 따름이었다.

   오랜 뒤에 나는 더위를 피할 만한 곳을 한 군데 찾아냈다. 집 뒤에 작은 언덕이 뚝 떨어졌는데, 그 위가 자못 널찍한 데다가 사방으로 대나무가 둘러 있었다. 맑은 대줄기들이 꼿꼿이 서서 우거졌으니, 그윽한 정취가 느껴졌다. 마침내 노복을 시켜 잡초를 쳐내고 썩은 흙을 퍼내도록 하였다. 그러고 나서 한번 올라가 바라보니 앞쪽이 시원하게 트여 마치 속세 바깥으로 벗어난 듯하였다. 멀고 가까운 산들과 굽고 뻗은 물줄기에다, 마을의 밭두둑과 들판의 도랑이 수놓은 듯 가로세로 펼쳐져 내 발과 지팡이 아래에서 다투어 모양을 드러냈다. 또한 처한 땅이 높은 까닭에 바람도 많이 불어왔으니, 매번 회포를 쏟고 소요하기에 아주 쾌적하였다.

   그러나 폭염과 들이치는 빗줄기 때문에 항상 머물기가 어려웠으므로 이들을 가릴 대책을 꾀하였다. 그런데 재목을 구해 집을 짓는 일은 힘에도 부칠 뿐 아니라 또한 내가 그러고 싶지도 않았기에, 마침내 큰 대나무를 가져다가 하나의 시렁처럼 엮어 정자를 지었다. 들보와 서까래, 기둥을 모두 대나무로 만들었으니, 다른 나무가 하나도 끼어들지 못했다. 단지 아래쪽에만 나무로 네모난 틀을 짜고 사방 귀퉁이에 홈을 파서 기둥을 잇도록 하였으니, 통째로 엮어 흙이 대나무에까지 튀어 오르지 않도록 함이었다. 정자의 높이는 한 길 반으로, 넓이도 그처럼 하였다. 바닥의 높이는 한 자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니, 아침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벌써 끝이 났다. 쑥대를 엮어 지붕에 씌우고 깔판을 짜서 바닥에 깔아 침상을 대신했으며, 그 위를 돗자리로 덮었다. 돗자리와 깔판 또한 대나무로 만들었다.

   정자가 이루어지자, 나는 갈건에 베옷 차림으로 날마다 그 가운데를 거닐었다. 글줄을 외우고 시구를 읊조리며 스스로 즐겼는데, 놀다가 피곤하면 술잔을 기울이다 취해 안석에 기대어 잠들면서 조물주와 더불어 화락하게 놀았다. 어느덧 잠 깨어 일어나면, 신선한 바람은 절로 일고 푸른 댓잎들이 엇갈려 그늘을 이루었다. 월출산의 상쾌한 기운은 살랑살랑 옷깃과 소매로 파고들어 사람의 심신을 맑고 밝게 만드니, 서늘한 바람을 타고 한문(寒門 북극의 문)으로 날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저녁 빛이 푸르러지면, 새로 돋은 달이 수풀 끝을 비추었으나 흥취는 오히려 그치지 않았다.

   이런 때를 만나면 문득 이 몸이 죄인인 줄, 땅이 황량한 유배지인 줄, 때가 뜨거운 여름인 걸 모르니, 하물며 세상의 시비, 득실과 영욕이 다시금 내 마음에 걸릴 것이 있으랴. 설령 나로 하여금 앞서 언급한 바위틈의 절이나 물가의 정자에 몸뚱어리를 이르게 한다고 하더라도, 맑고 시원하고 유유자적한 흥취는 반드시 이와 같지 못하리라.

   옛날 유주 자사(柳州刺史)를 지낸 유종원(柳宗元)은 ‘고무담기’(鈷鉧潭記)에 이르기를 “나로 하여금 오랑캐 땅에 즐겁게 살면서 고향 땅을 잊도록 하는 건 이 고무담이 아니던가.〔使予樂居夷而忘故土者, 非玆潭歟?〕”라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내가 이곳에서 즐기며 곤궁한 신세를 잊음 또한 이 정자의 도움이니, 어찌 이 정자로 하여금 그저 사라져서 이름이 없도록 하겠는가? 마침내 이름을 지었으니, ‘풍옥’이다.

  그런데 지나가던 나그네 중에 나에게 따지는 자가 있었다. “바람이란 정자가 본디 지닌 바이니, ‘풍(風)’이란 글자를 넣어 이름 짓는 건 옳다. 그러나 얽어 만든 것이 거칠고 투박하여 마치 수풀 속의 새 둥지를 대충 꾸민 데 불과하거늘, 억지로 이름 붙여 정자라고 하니 또한 걸맞지 않다고 하겠다. 그런데도 지금 ‘옥’(玉)이란 글자를 내걸어 이름하였으니, 과장이 심한 것 같도다. 의도에 무엇이 담겨 있는가?”

내가 응답하였다. “아닐세, 아니라네. 내 성품이 본래 대나무를 사랑한 데다가, 지금 다행히 대숲 속에 자리를 얻고 또한 대나무로 정자를 지었으니, 일어나 거처하고, 베거나 눕고, 굽어보거나 우러러보고, 둘러보거나 바라볼 적마다 대나무 아닌 것이 없다네. 대저 바람이 대나무와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정 부자(程夫子)의 감응설(感應說)을 보더라도 또한 알 수 있다네. 매양 바람이 불어와 정자에 닿으면 살랑살랑 문지르고 가볍게 스치면서 저절로 소리를 이루어, 사각거리거나 쟁그랑대는 소리가 나 마치 푸른 옥을 부수듯, 패옥을 울리듯 하네. 이는 정자가 소리를 내는 게 아니요, 대나무가 소리를 냄이라네. 또 사방을 돌아보고 들어 보면, 대나무가 좌우에 빽빽이 들어차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 없어 챙챙거리거나, 서걱서걱 울린다네. 그 소리가 해맑고 긴데, 대나무가 소리를 내는 게 아니요, 바람이 소리를 냄이라네. 소리는 비록 바람과 대나무가 내지만 귀에 들리는 건 죄다 옥 소리이니, 정자에다 ‘옥(玉)’이란 글자를 넣어 이름 짓는데 어찌 아니 될 이유가 있는가? 또한 옛날의 군자들은 옥에다 덕을 비유하였는데, 윤기 나고 말쑥하며 곧고 드리우는 덕은 대나무가 실로 흡사하기에, 옥을 대나무에 비유한 것 또한 많았다네. 이렇게 〈기욱(淇澳)〉의 녹죽(綠竹) 구절을 읊조리는 것은, 규벽(圭璧)을 갈고 다듬는 성대한 덕을 흥기시키기 위해서라네. 나는 대나무에게서 한갓 바람의 맑음을 가져다 번뇌를 씻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옥에다 비할 만한 덕을 취해 진덕수업(進德修業)의 법도로 삼고자 한다네. 그래서 ‘옥(玉)’이란 글자를 넣어 정자의 이름을 지었으니 취지가 실로 여기에 있다네. 거칠고 투박한 것은 꺼릴 바가 아닌데 심지어 과장한다고까지 말하니, 또한 나를 아는 정도가 얕은 게 아닌가.”

 나그네가 “예, 예. 알겠습니다.” 하고 물러났다. 나는 그와 나눴던 말을 적어 기문(記文)으로 삼았다. 

<출처: 문곡집 권26/기(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