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를 귀하게 여기고 재물을 천하게 여겨야”

월출산 벚꽃 백 리 길[137] ■ 구림마을(46)

2024-06-07     김창오
회사정 전경 – 회사정에는 수천 그루의 꽃무릇이 심어져 9월이면 붉은 꽃물결로 장관을 이룬다. 2015년 당시 박종대 군서면장(현 영암군 의원)이 회사정 앞뜰의 풀밭을 정비하여 꽃무릇과 차나무를 심었다. 분서공 박미는 태호공 조행립의 부탁을 받고 회사정기를 썼는데 조선 중기 구림사회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다.

박미의 회사정기(2)
「(중략 – 구림마을 43편 서호정 기사 참조) 
내가 남쪽에서 떠난 지 10여 년이 되었는데 조백원(조행립의 자) 형이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내가 고을의 수령을 그만둔 뒤로 이 마을에서 살면서 자취를 어루만지며 감회가 일어날 때마다 개연한 마을을 금할 수 없었으므로 마을 사람들과 같이 다시 회사정을 건립하였는데 과거의 사람들이 건립한 것보다 더 화려하게 지어 후세의 사람들이 보도록 하였다. 그대는 옛날 이 마을을 알고 있으니만큼 나를 위해 기문을 써주었으면 한다. 그러면 그것을 금약으로 삼아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제1의 법령으로 삼게 하려고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내가 병을 자주 앓은 탓에 글 짓는 일이 겁이 나서 오래도록 착수하지 못하였다. 그 뒤 조형의 편지가 해마다 대여섯 통씩 왔는데, 회사정 기문을 써달라고 부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임오년(1642년 인조 20년)에 조형이 평시서 영으로 발탁되어 도성으로 돌아오자, 손수 회사정의 본말을 기록해 찾아와 날마다 글을 지어달라고 심하게 독촉하기에 내가 그 글을 받아 다 읽어보았다. 

그리고 이에 생각해 보건대, 옛날에 백관과 만인을 위하여 사를 세워서 신인을 화목하게 하였기 때문에 사사를 위해서는 마을의 사내들이 흥기하고 사전을 위해서는 나라의 사람들이 흥기하고 제사를 지낼 때는 다 같이 공경하고 나물을 나누어 먹을 때에는 다 같이 즐긴다. 부부끼리 항상 이곳에서 모이고 모이면 항상 이곳에서 즐겼으니 정말 모든 아름다운 일이 모이는 곳으로서 사를 보면 무리들과 즐거워한 줄을 알 것이다. 그렇지만 즐거워한다는 것이 어찌 정말로 북을 치고 술을 마시며 뱃놀이를 하고 술에 취하여 신발을 잃어버리고 갓끈이 끊어진 줄을 모르는 것을 말하였겠는가. 이에 성인이 반드시 도리로 절제시키기 때문에 군자가 인화를 면한 것이니 앞에서 말한 향약과 향음주례가 이로 말미암아 제정된 것이다.

내가 일찍이 예를 배웠는데, 예는 주인과 손님 및 찬례를 위하여 만든 것으로써 삼빈이 각각 자리가 있고, 또한 상징한 바가 있으니, 천지 음양 삼광 성백 사시라고 하는 것은 괜히 한 말이 아니다. 향음주례하는 자들이 이것을 분별하여 사양하면 다투지 않을 거이고, 공경하면 오만하지 않을 것이며, 오만하지 않고 다투지 않으면 쟁송이 멀어질 것이고 쟁송을 하지 않으면 횡포의 화가 없을 것이다.

또 <향음주의>에 “이 자리의 진정한 의미는 오로지 음식을 먹기 위한 것이 아니고 향음주례를 향하기 위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예의를 귀하게 여기고 재물을 천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오로지 음식을 먹기 위한 것이 아니고 예를 먼저하고 재화를 뒤로 하는 의의가 있으니, 예를 먼저하고 재물을 뒤로하면 백성들이 공경하고 사양하여 다투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렇게 예라는 것은 오직 예를 먼저하고 재물을 뒤로하여 공경하고 사양하여 횡포를 부리지 말며 전전긍긍해야 한다는 뜻을 <향음주의>한 편에 수없이 강조하였다. 그리고 또 그 대요를 들어 말하기를 “공경으로 견지하는 것을 예라 말하고, 예로 규범을 만들어 장유로 하여금 힘써 실천하도록 하는 것을 덕이라고 말한다. 덕이라고 하는 것은 몸으로 실천하여 얻은 것이기 때문에 옛날 예도를 배우는 사람은 몸에서 얻으려고 하였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성인 힘을 썼던 것이다. 이것 외에도 출입할 때 서로 우애하고 바라볼 때 서로 협조하고 병들면 서로 부축해 준다. 이를 합쳐 상벌로 권장하거나 징계하면서 삼물로 흥기시키고 팔형으로 규제하였으니, 옛사람이 백성을 위해 생각하는 바가 크고 후세를 위하여 법을 만든 바가 주밀하였다.

아, 우리 동방이 거듭 액운을 만나 전후 50여 년간 전란이 그치지 않은 탓으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난리가 폐막이 되어버렸다. 비록 남방은 한 조각의 깨끗한 지역이라고 하나 풍속이 말단에 이르렀는데 그 누가 휩쓸리지 않았겠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구림촌은 크고 작은 민호가 무려 수천이나 되어 인구가 매우 많고 가옥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으므로 한 치의 땅이 금과 같아 채소를 심을 만한 밭도 없다. 그리하여 산을 등지고 호수를 안고 있지만 벼논이나 기장밭이 대체로 1백 경이 채 되지 않으므로 그 사람들이 고기를 잡지 않으면 장사를 하고, 장사를 하지 않으면 장인 노릇을 하는데, 그래도 노는 손이 반이나 된다, 그리고 선비는 위로는 각고의 공부를 하여 부지런히 실천하면서 생각을 깊이 하지 못하는가 하면 아래로는 족구를 하거나 장기를 두지 못하면 화사한 옷차림으로 날랜 말을 타고 다니며 한가로이 노니는 공자와 사귄다는 명성이 있다. 
이와 반대로 외부의 유혹에 빠져 혹은 꽉 막혀 아무것도 모르거나 혹은 방자하여 제멋대로 행동하기도 하는가 하면 기서를 부리고 언변을 숭상하며 괴변을 늘어 놓고 시기하면서 남의 장단점을 견지하는 자들도 있다. 그리고 여인들은 비록 거문고 소리에 따라 춤을 추며 추파를 던져 사람을 유혹하지 못해도 길쌈과 소원하여 대부분 시장에 나가는 풍조가 있으니 그 풍속의 병이 점점 유래된 바가 있다.

옛날 구암공(임호)이 정사를 할 적에는 교화가 잘 먹혀들어 갔으나 오늘날 조형(조행립)이 정사를 할 적에는 교화가 잘 먹혀들어 가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풍속이 병든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이 점이 어려운 것 중에서도 어려운 것이다. 내가 향약과 향음주례를 모두 거론한 것은 그 이유가 단적으로 여기에 있으니, 조형께서는 위에서 표상이 되어 이끌어 갈 적에 그 방도를 다하였으면 한다. 공자께서 “내가 향음주례를 보고 나서 왕도를 시행하기가 쉽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씀하지 않았는가? 나이를 존중하고 덕을 숭상하며, 어른을 어른으로 대우하고, 어린이를 어린이로 대하는데도 공경하고 사양하는 마을이 저절로 우러나오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다. <공자가 말씀하기를> “지금 백성들은 하 상 주 삼대에 올곧은 도리대로 실행했던 백성들과 똑같은 사람들이다”고 하였는데, 지금에도 어찌 반드시 그러한 사람이 없어서 끝내 교화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향음주의에> ”주인이 앉을 적에는 반드시 동쪽에 앉는다“는 것은 방형은 땅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동쪽은 봄으로 만물이 생동하고, 여름에는 성장하고, 가을에는 수렴하고, 겨울에는 갈무리하는 등 각자의 처소에서 책임을 맡아 어미 학이 울면 새끼 학이 화답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는데, <향음주의>에 이른바 만물을 생산한다는 것은 주인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으니, 이는 실로 조형의 책임이다. 점점 마을 사람들이 서로 교화되어 예를 먼저하고 재물을 뒤로하여 공경하고 사양하여 다투지 않는 수준에 이른다면 지기가 남쪽으로부터 시작되어 앞으로 뜨거워질 것이다. 나는 노둔한 사람이기에 거론한 것이 옛날의 예 뿐이다. 그렇지만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사람을 보고 말까지 하찮게 여기지 않는다면 나 또한 더불어 다행이겠다. 우리 조형이 벼슬에 싫증이 나서 나라에 폈던 정사를 수렴하여 고향에서 그 정사를 시행하려고 한다면 혜택은 몇 리에 벗어나지 않겠지만 이 또한 정사라고 외람되게 말할 수 있다. 우리 조형의 마음에 우연히 해당되는 부분이 있기에 감히 이를 써서 마을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에게 고하는 바이다. 

계미년(1643년 인조 21년) 정월 15일 
분서거사 박미 중연은 성남의 누사에서 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