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임씨의 학문적 업적과 공동체 정신, 구림마을 곳곳에 면면히 흘러
월출산 벚꽃 백 리 길[135] ■ 구림마을(44)
구림을 떠난 선산임씨 가문
지금까지 구림마을을 답사하면서 구계 박이화가 쓴 낭호신사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도선국사와 월당 임구령과 그의 장남인 구암 임호에 대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다뤄왔다. 도선국사는 구림(鳩林)이라는 마을 이름을 가져다준 인물이고 선산인 임구령과 임호는 요월당, 진남제, 쌍취정, 회사정, 대동계 등을 창설하여 구림마을의 기틀을 만들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아스럽게도 오늘날 선산임씨 후손들은 구림마을에 남아 있지 않다.
군서면에서 요월당과 쌍취정을 짓고 그토록 활발하게 활동하던 선산 임씨들이 왜 구림마을을 떠나 서호면 영모정마을로 이주를 했는지 몹시 궁금했다. 월당 임구령의 종손인 임선우 씨와 임선수 씨 형제를 만나 그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구암공(남호처사) 임호 할아버지가 3남을 두었는데 세 아들이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손자인 임자승이 진사시험에 장원 급제한 인재였는데 강진현감으로 있던 중 35세의 젊은 나이에 후손을 두지 못하고 어린 딸만 남겨둔 채 요절하고 말았다. 그래서 해남 본가에서 7살 된 아이를 양자로 입양하여 대를 잇게 하였다. 당시에는 부모의 유산을 아들과 딸에게 공평하게 분배하던 시절이었다. 그 많던 재산이 월당공 집안에 장가들었던 사위들에게 분배되면서 재산의 규모가 점점 줄어들었고, 자손들이 번창하지 못하고 결국 양자를 입양하는 사태가 오면서 재산 관리도 제대로 안 되어 집안이 많이 쇠락하게 되었다.
특히 임자승 할아버지의 요절이 가장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서울 남사골에 살면서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과 동갑내기 친구로서 막역한 사이였다. 원래 서울에서 살았지만 영암에 홀로 계신 어머니 곁으로 오고 싶어 강진 현감을 자원했다. 장원 급제한 뛰어난 인재로서 본인이 가지고 있는 학문과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월당 임구령은 1562년에 세상을 떠났다. 명종 임금은 예조좌랑 송강 정철을 보내 제물을 올리고 제문을 밝혔다. “공은 영명하고 기품이 높으며 천지에 맑았으니 산악이 몰래 울며 남으로 내려가는 듯하다. 능히 나라를 근심하여 몸은 미관에 있었으나 마음은 왕실에 있었느니 비범한 인물이었도다... <중략> 내 비통함을 사직에 묶고 보잘것 없는 제물을 보내어 충정에 보답고자 할 따름이라.”
임구령의 묘소는 현재 서호면 영모정마을 용지봉 기슭에 있다. 후손들은 묘소 아래 제각과 영당을 지어 관리하고 있다.
한편 임구령의 장남인 남호처사 구암 임호는 영특했던 세 아들을 먼저 보내고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1592년에 세상을 하직했다. 구암의 손자였던 임자승은 할아버지를 여읜 지 겨우 삼 년 만에 후사를 잇지 못한 채 요절하고 말았다. 요월당과 쌍취정에서 동생인 임구령과 함께 풍류를 즐겼던 석천 임억령의 아들 또한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고 한다. 이로써 선산 임씨들의 영화로웠던 가문이 쇠락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암공 임호의 문집에는 중부인 석천 임억령의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가 한 수 기록되어 있다. 임호는 사촌 동생 임찬연의 요절로 인하여 큰아버지 가문의 대가 끊기고 만 것에 대해 비통해 마지 않았다. 다음은 임호가 남긴 애도(哀悼) 시다.
당제(사촌동생) 찬연을 애도하며–석천공의 아들
늘상 가문이 기우는 것을 한탄하더니
그대 지금 어느 곳으로 가는가
한 가지에서 난 핏줄들이 모두 곡을 하고
두 아우도 슬픔을 가눌 길 없도다
늘그막에 이 한 몸 남아
조상님 계신 이곳에서
누구와 마음속 이야기를 나눌꼬
죽을 날, 다 된 백발의 몸
상여를 뒤따르며 휘청거리네
중부(仲父) 석천공께서는 선현의 유업을 채워
문장과 덕업이 삼한에 우뚝하였네
그것을 이을 자식이 없으니 이 일을 어이할꼬
하늘도 무심코나 가히 구할 길 없도다
(출처: 남호처사 구암공 유고 127쪽)
서호면 영모정마을로 이사
임선수 씨는 선산임씨들이 구림 요월당에서 언제 현재의 영모정마을로 이사 왔는지 정확한 연대는 잘 모른다고 말한다.
“1760년대까지 구림 요월당에서 거주했던 것은 확실합니다. 아마도 1790년대 말에서 1800년대 초에 구림을 떠나 현재의 터로 이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공동체 정신, 계승 발전시켜야
시대가 인물을 내기도 하지만 인물이 시대를 만들어 가기도 한다. 월당 임구령은 조선 중기이던 1536년 요월당 건축, 1540년 진남제 축조, 1558년 쌍취정 건립하여 영암에 선산 임씨들의 터를 마련하였고, 그의 장남인 구암 임호는 사옹원직장 벼슬을 끝으로 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고향에 머무르면서 구림 대동계를 발족하고 회사정을 건립하면서 영암 군서 향촌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쌍취정에서 아우와 함께 풍류를 즐겼던 호남삼고 중 한 사람이었던 석천 임억령의 탈속한 정신세계와 맑고 기품있는 시풍(詩風)은 퇴계 이황, 율곡 이이와 같은 고명한 선비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임자승과 풍운아 허균의 우정은 후세인들의 심금을 울린다.
하지만, 모든 세상의 이치가 그렇듯이 영원한 것은 없다. 조선 중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암의 선산임씨들 역시 세월의 풍진을 이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고향마을에 남긴 학문적 업적과 마을 공동체를 향한 뜨거운 사랑은 지금까지도 진남제 십리 평야에, 모정마을 연못가 쌍취정 터에, 구림마을 회사정과 대동계사에 남아 후세인들의 삶에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들이 고향마을에 남긴 업적과 공동체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야 할 의무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있다고 믿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