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와 희망을 준 고마운 시

2022-12-08     윤재홍
윤 재 홍  서호면 몽해리 아천출신연합뉴스 뉴스통신진흥회 이사  전 경기대 교수(정치학 박사) 전 KBS제주방송 총국장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하지 마라 
슬픔의 날을 견디면
기쁨의 날이 찾아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괴로운 법
모든 것은 순간이며 지나가는 것이나 
지나간 것은 훗날 다시 그리워지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제목의 러시아 알렉산드르 푸시킨 시이다. 초근목피(草根木皮)는 풀뿌리와 나무껍질이다. 식량이 모자라서 곡식을 대신해 먹었던 가난한 시절이 자주 생각난다. 가난했던 소년 시절 이야기다. 

70대 중반인 우리들은 6.25 한국전쟁 직후 모두가 배가 고팠다. 당시 초등학교 시절에는 학교에 오가면서 주변의 밭에 남아있는 무와 배추 등의 풀뿌리를 캐서 먹었다. 또, 야산에 있는 소나무 껍질을 벗겨 속살을 먹으며 배고픔을 달랬다. 

당시 고향의 초등학교는 책상과 의자가 없었다. 볏짚으로 만든 가마니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앉아 수업을 받았다. 싸이렌이 울리면 수업 중에도 교실에서 나와 방공호 속으로 뛰었다. 부족한 영양을 보충하기 위해 큰 가마솥에 가루우유를 물에 넣고 끓여 어린이들에게 먹였다. 그 시절 기억이 또 있다. 쥐를 없애기 위해 쥐꼬리를 의무적으로 3개 이상 학교에 가져오게 했다. 회충약을 나눠주고 다음 날 항문에서 나오는 회충을 2마리 이상 가져오게 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우리의 초등학교 동창생들은 보통 나이가 3~4세 이상 차이가 났다. 6.25전쟁으로 인하여 제 나이에 초등학교 입학을 못해 들쭉날쭉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의 추억이 됐다. 

필자는 고향 중학교에 진학했으나 1학년 2학기 때 등록금이 없어 자퇴했다. 어머님의 농사일을 도우면서 중학교 과정의 수업을 독학했다. 그 후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는 고등공민학교에 편입해 공부했다.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우연히 어느 책에서 알렉산드르 푸시킨 시를 읽었다. 시 내용이 너무나 나에게 감명을 주었다. 어린 소년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제목부터 내용까지 모두가 어린 소년 시절의 필자 자신에게 큰 가르침과 자극을 준 고마운 시라고 생각했다. 시를 쓴 푸시킨 시인에 대해서 호감이 가 자세히 알아 보았다. 비록 러시아 출신의 외국인의 시였지만 이 시인이 한국인이었다면 더욱 감명받아 직접 찾아가고 싶은 충동까지 느꼈다. 

푸시킨 시인은 1799년 5월 26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러시아 귀족 집안이었다. 푸시킨은 유명한 소설가이자 시인이었다. 그는 러시아 근대문학의 창시자이며 러시아의 국민 시인이기도 했다. 푸시킨의 아버지는 러시아 귀족이고 어머니는 표토르대케 흑인 출신이다. 그는 자신이 6백 년 전통의 러시아 귀족 혈통과 어머니의 아프리카인 피가 흐르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푸시킨은 10살 때부터 자작시를 쓰기 시작했다. 12살에 130편의 시를 써서 15살에 첫 시집을 냈다.        

17살에 자작시 낭독 문학가로 각광을 받으면서 푸시킨이 세상에 알려졌다. 푸시킨은 희곡인 '모차르트와 실리에리'도 써서 1898년 오페라화 했다. 1984년에는 영화화되어 더욱 세상에 알려졌다. 푸시킨은 1931년 상류층 미인인 곤차로바와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 후 자신의 아내가 염문을 일으키고 다닌다는 소문을 낸 프랑스 근위대 장교 당대스와 결투를 벌여 37세에 세상을 떠나버린 슬픈 사연이 안타까웠다.

푸시킨 시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는 주경야독의 고학 생활을 시작했던 나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고향에서 고등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그리고 무작정 상경했다. 서울에서 새로운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야 했다. 낮에는 작은 신문사 편집국에서 일했다. 늦은 오후에는 대학의 길을 가기 위한 정규 고등학교 학생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당시 직장에서 월급을 받아 등록금, 생활비 등을 충당했다. 생활비가 모자라 신문사 사무실에서 32구공탄 연탄불을 갈고 사무실과 화장실까지 청소하며 일한 돈으로 학비를 마련했다. 밤에는 책상 위에서 군용담요를 깔고 덮고 잤다. 전기 곤로에 밥을 지어 먹는 자취 생활에 만족해야만 했다. 당시 고통과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푸시킨 시를 낭독하며 스스로를 위로해 아픔을 견뎌냈다. 성균관대학교 법률학과에 진학해서도 고학을 계속해야만 했다.

대학 입학 후 1학년 2학기 등록금이 없어 군에 우선 입대했다. 당시 군복무 기간은 34개월이다. 만 3년에서 두 달이 빠진 장기 복무였다. 대학에 복학하여 다시 고교시절의 고학 생활을 걸어야만 했다. 당시 법대생으로서 고시 시험 준비는 당연했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도 희망했던 법관의 길을 포기해야만 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대학생들이 입주 과외가 크게 성행했다. 입주 과외를 하면 숙식이 해결되고 용돈까지 벌 수 있으나 등록금은 해결되지 못했다.

그래서 필자는 더 많은 수입을 위해 중고교생 그룹과외 선생으로 4군데를 뛰어다니며 동분서주했다. 학생들을 지도하는 공부를 별도로 해야 되고 기존 법과대학 강의에도 충실해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제대로 잠을 못 자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때도 푸시킨의 시를 혼자서 낭독하며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희망을 위해 꾸준히 성실하게 노력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고교와 대학 시절을 지나 새로운 직장인 방송기자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기자 생활에서도 고통과 역경이 닥칠 때마다 푸시킨 시는 계속 따라다니며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세월은 화살보다 빠르다는 말을 나이 70대 중반이 넘어서야 실감할 수 있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즐거움과 희망만 계속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대학을 나와 새로운 직장에서 30년의 긴 세월을 보내면서도 치열한 경쟁과 노력의 긴장이 계속된 삶이었다. 정년 후 새로운 노후를 살아가면서도 계속 즐거움과 행복만 있는 것이 아니다. 끝없는 희로애락의 인생길에서 항상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계속되고 있다. 푸시킨의 시는 직장생활은 물론 우리 노후의 삶을 살아가는데도 많은 용기와 희망을 주는 새로운 인생의 활력소가 되고 있음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