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진암 터를 지나 용암을 우러러보니 날렵한 용마루가 구름에 꽂힌듯…"

2021-06-18     김창오
잡초만 무성한 용암사 터 / 한때 호남 제일의 암자였던 용암사지 전경. 지금은 주춧돌만 나뒹굴고 잡초만 무성하다. 바위 아래 우물과 동탑은 그대로 남아 옛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용암사가 복원되는 날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창주 정상의 월출산 유람기

정상(鄭祥1533~1609)은 조선 중기 문인으로 자는 중신이고, 호는 창주, 본관은 나주이다. 설재 정가신의 후손이다. 선조 7년(1574) 갑술 별시에 갑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정운·송희립 등과 함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싸웠다. 


갑진년(1604년 선조37) 음력 4월 26일 월출산 유람을 떠났다. 

월악(月岳)을 창밖으로 마주한 지 70여 년 전인데도 진면목을 보지 못하여 항상 한으로 여기다가 새로 지은 용암(龍庵)이 호남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말을 듣고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종손자 정란이 나를 따랐다. 서둘러 밥을 먹고 출발하여 수원(신북면 부선마을)에 이르니 영암군 사람들이 나와 맞아주었다. 말을 달려 영암에 들어갔더니 군수가 침을 맞고 뜸을 뜨는 중에 아헌(衙軒)에 나왔기에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나왔다.

녹거동(鹿車洞:회문리 1구 녹동마을) 초입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종을 돌려보내고 공생 김세한을 데리고 죽장에 짚신을 신고 발길 가는대로 올라갔더니 겨우 산 중턱에 이르렀는데도 이미 속세가 아니었다. 깎아지른듯한 거대한 바위, 미친 듯 맹렬한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폭포, 이 모든 것이 보는 사람 눈이 번쩍 뜨이고 간담이 덜덜 떨리게 했다. 달아날 듯 머문 듯, 싸울 듯 공손한 듯한 모습이 용이 날고 호랑이가 뛰어오르며, 봉황이 춤추고 난조(鸞鳥)가 나는 것 같았으며 그 사이에 쇠를 부딪고 옥을 두드리는 소림, 축(筑:거문고 비슷한 악기)이며 금(琴:거문고)을 타는 소리가 들리니 눈이 번쩍 뜨이고 귀가 멍멍해 혼돈 굴에 들어가 조물주의 새로운 악곡 연주를 보는 것 같았다. 

족인(族人) 문상소가 뒤쫓아 왔기에 넓고 편편한 바위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옛 암자의 승려 10여 명이 가마를 가지고 내려와 마침내 가마를 타고 길을 갔다. 골짜기는 좁다랗고 기이했으며 봉우리는 높고 가팔라서 채색한 그림 병풍 사이에 지팡이를 짚고 옥으로 만든 병 속에 짚신을 끄니 날개를 달고 신선이라도 된 듯 세상 생각이 사라졌다. 왼쪽으로 키 큰 나무가 우거진 골짜기가 보이는 곳에 녹거사(鹿車寺)라고 하는 옛 절터가 있다. 박달암(朴達巖)에서 쉬며 숲속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곳을 보니 가까이서 행승 네다섯 명이 밥을 지어 먹고 있기에 물으니, 객사의 화주(化主)가 사 온 해채(海菜:바다 나물)라고 하였다. 또 가다가 수박암(水朴巖)을 지났는데, 바위 위에 구멍이 움푹 파였고 구멍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상진암(上眞庵) 터를 지나서 용암(龍庵)을 우러러보니 날렵한 용마루가 구름에 꽂힌듯 했다. 하늘 높이 바위가 우뚝 솟은 곳에 절을 들여 세웠는데 단청이 눈부실 정도여서 병란(임진왜란)을 겪은 이후 가장 뛰어나게 지은 것이다. 왼쪽 소루봉(小樓峰) 꼭대기는 바다빛이 그 아래에 깔렸는데 하늘빛과 낙조를 한 데 녹이 빛을 이루어 금빛으로 빛났다. 법당에 들어가니 금불(金佛) 1구가 있고, 선승 30여 명이 무리지어 가사를 입었는데 독경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날이 저물어 누웠더니 정신은 맑고 뼛속까지 서늘하여 도원(桃園)의 옥당(玉堂:신선의 거처)에 들어온 듯하였다.(용암사에서 1박)

4월 27일은 맑았다. 암자 서쪽 돈대(墩臺)에는 거대한 바위가 나란히 서 있는데, 하나는 금저굴(金猪窟)이고 다른 하나는 노적암(露積巖)이라고 하였다. 법당 뒤 맑디맑은 샘물은 맛이 좋고 시원한데,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 2층 돌계단 아래에 옹기가 있는데 양식과 반찬을 저장하는 곳이다. 누각 남쪽에 첩암(疊巖)이 있어 위로 솟구쳤는데, 늙은 용이 머리를 말아 올린 채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모양 같아서 암자 이름을 용암(龍庵)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 서쪽에는 석봉이 병풍처럼 둘러싸 서해를 가로막아서 가리기도 하고 이지러지기도 했으나 천리 밖이 한눈에 들어와 크고 작은 섬들이 어슴푸레 보여 창에 기대어 휘파람을 부니 유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암자 동쪽에 석탑이 있는데 5층으로 매우 진기하기에 종손자 정란에게 이름을 적으라고 하였다. 

구정봉에 올라가니 북쪽으로는 천황봉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삽허봉(插虛峰)이, 남쪽으로는 불도봉(佛圖峰)·미륵봉(彌勒峰)·선번봉(仙幡峰)이 칼을 묶어 허공을 받친 듯, 갈래창(극 戟)이 공중에 가로 걸린 듯한 모습이 사방으로 끝이 없어 속되지 않은 우아한 흥취가 갑자기 일어났다. 바위에 구멍이 있어 겨우 소년들이나 몸 하나 들어갈 정도였다. 이 구멍으로 들어가 정상에 오르니 구정(九井)이 있고 각각에는 모두 물이 담겨 있었다. 스님에게 흔들바위(動石)를 흔들어보게 했더니 흔들리지만 땅에 축을 박은 것 같았다. 이런 까닭으로 고을 이름이 영암이다. 바위 아래에 유람한 사람이 이름을 쓴 곳이 있는데 돌 틈으로 살펴보니 천 길이나 되는 낭떠러지가 참으로 기이하여 팽조(彭祖:요순시대부터 800년을 살았다는 팽조 고사)가 우물 바라볼 때 경계하는 뜻이 있었다. 옛사람이 소금강이라고 한 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고산(孤山)에 있던 옛터가 어찌 감추어지기만 했을라고. 거칠고 사나운 세상에 울긋불긋 진달래가 사방에 피어 끝없이 물들여 신기루가 봉래산(蓬萊山)에 닿았으니 평생의 숙원을 시원하게 풀어 참으로 즐거웠다. 

동쪽에는 양자봉(養子峰)이 있는데 몹시 험하여 호남 백성이 많이 피란했던 곳이라고 한다. 바람이 점차 세게 불어 추워지기에 도로 용암으로 내려와 묵었다. 삼존암과 사자봉이 아름답다고 들었는데 승경을 가지 못하여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노승이 시를 지어달라고 하기에 혜웅시축에 실린 한음 이덕형의 시에 화운(和韻)하여 주었으니 다음과 같다. 

남쪽 모퉁이 한가한 유람은 소금강인데
가을 지리산 날던 아득한 꿈도 꾸었었지
산중에 다소간 흥취 있다고 들었더니
이 몸은 강가 누각에 누운 것 같구려

또 설순시축에 실린 임당 정유길의 시에 차운(次韻)하였으니 다음과 같다.

동봉이 짙푸르니 흡사하기 서봉일세
쉬려다 이끌려 죽장 짚고 명승 찾네
겨드랑이에 깃털이 나지는 않으리니
홀로 선탑에 의지한 늘그막 부끄럽소

28일은 흐렸다. 걸어서 서쪽 재를 넘으니 5층 석탑이 있어 동탑과 마주하여 섰고, 그 사이에는 거대한 절벽이 있어 미륵상(마애여래좌상)을 새겼는데 그 모습이 매우 진기했다. 산기슭 하나를 넘으니 석굴이 있는데 90세 노승이 살고 있었다. 노승은 고적(古跡)에 대해 잘 말해주었다. 옛날 면상 조사가 있어 이곳에서 공부하였는데 용암 아래 금돼지(金猪)가 아침저녁으로 와서 지켜주었고, 이를 타고 다녔는데 마침내 부처가 되어 떠나갔다고 하였다. 좌우는 봉우리들이 줄지어 이어졌고 앞은 큰 바다가 시원스럽게 트여 빼어난 경치가 용암보다 좋았다. 계곡을 따라 내려오니 또 석굴이 있는데 위에 있는 석굴보다 조금 널찍하여 스님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서쪽에는 관음암(觀音巖)이 있어 십여 사람이 앉을 수 있고 서해와 남해 바다가 눈길 닿는 데까지 끝없이 보이니 왜놈의 배가 드나들던 때가 생각이 나서 이따금 탄식이 나왔다. 밤에 노승과 편안히 이야기를 나누는데 우리나라에서 산수가 빼어나기로는 묘향산과 개골산을 제일로 친다고 하였다.

29일은 흐렸다가 개었다. 영암군 향교 유생의 제술(製述) 15도(度)를 평점(評點)하고서 중들에게 가마를 메라고 하여 골짜기를 따라 내려왔다. 오르락내리락 10여 리를 가서 도갑사 벽간정(碧澗亭)에 이르러 용추(龍湫:용수폭포) 가에서 쉬었다. 부드럽고 맑은 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들고 물기가 살갗에 스며드니, 괴로움이 홀연히 씻기어 앉은 채 돌아가야 하는 것도 잊었다. 중에게 못 기슭의 초목을 잘라내게 하였더니 사람 그림자가 못에 드리워 한층 마음이 상쾌하였다. 임탄, 송정란, 최홍섭, 최위가 찾아와서 만났다. 두부를 만들었는데 한참을 주린 뒤라서 58꿰미를 먹었더니 대단히 배가 불렀다. 

도갑사는 호남의 거찰인데 병영과 수영에 침학(侵虐)을 당하여 중 세 사람만이 불공을 받들고 있어 방마다 무너지고 파손되었으니 오래가지는 못할 형편이다. 밤에 선방에서 묵는데 80세의 노승 혜원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축(詩軸”시를 적은 두루마리)에는 소재 노수신, 석천 임억령, 청련 이후백, 자순 임제의 장편 시가 있는데 필적이 진기하였다.

30일은 맑았다. 채찍을 휘둘러 산 밖으로 나오니 홍진(紅塵)은 9자(尺)에 이르렀고 괴로운 마음은 여전하였다. 머리 돌려 선봉(仙峰)을 바라보니 창칼이 빽빽하게 줄지어 늘어서서 세속에 물든 사람을 엄히 꾸짖어 다시는 선경을 밟지 못하게 하니 참으로 부끄러웠다. (출처: 월출산유산록 창주선생일고/ 영암군, 국립나주박물관 2015. 2. 11)
 
글/사진 김창오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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