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에 계신 아버님 전상서
사랑하는 아버님! 하늘나라에서 편히 영면하고 계시지요. 저는 아버님 얼굴도 기억할 수 없어요. 갓난이 때 처음 뵙고 이제 칠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어요. 저는 태어나 열 달도 안 돼 아버님의 따뜻한 품이 그리웠는데요. 그 길이 그렇게도 바쁘시던가요? 새색시 우리 어머님도 버리고 무정하게 떠나셨어요. 집안의 기둥을 잃은 우리 가족은 어떻게 살아가라고 그러셨어요. 그날 마을 뒤쪽에서 그렇게 총소리가 요란해 어머님이 말리셨다는데요.
아버님! ‘부길’이 삼촌은 “고놈, 참 잘 생겼다. 앞으로 우리 집안 대들보가 될 놈인걸.” 하며 저를 자주 안아 주셨다지요. 이 삼촌이 우리 가정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단초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예요.
아버님! 악명 높은 형사 김○○에게 붙잡혀 가시던 날은 날씨가 추웠다지요. 스물여섯 젊은 청년이던 아버님은 왜 그냥 순순히 따라가셨어요. 형사가 총이라도 들이대던가요? 꼼짝 못하게 오라로 묶던가요? 그들은 아버님이 신부길 형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잡으러 왔으니 별 수 있었겠어요? 형제니 아버님도 빨갱이쯤으로 가정했겠지요.
그리운 아버님! 저도 올해 일흔두 살이어요. 흰머리가 늘었어요. 죄송하지만 저도 늙었나 봐요. 어머님은 아버님이 돌아오시리라고 믿고 50년을 자나 깨나 기다리시더라고요. 남북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할 때는 행여나 아버님이 나오시나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하시고, 아버님이 그리우면 자주 ‘사랑의 배신자’라고 서운한 말씀을 엄청나게 하면서도 늘 그리워하셨어요. “젊은 각시에게 가족을 떠맡겨놓고 자기는 책임 없이 먼저 갔나 본다.”라면서도 아버님을 보고 싶어 했지요.
그렇게 아버님을 그리워하시다가 2000년, 아버님이 돌아가시던 바로 그날, 어머님은 기구한 생을 마감하셨어요. 지금은 함께 계시지요? 어머님은 아버님을 만나러 가시는 날, 얼굴이 참 평온했어요. 그리운 서방님을 만나러 가시려니까 그랬나 봐요.
사랑하는 아버님! 아버님이 경찰들에게 끌려가서 덕진면 한새 다리 부근에서 열두 명이 함께 희생되시던 현장에서 식구들의 시체를 거두던 신○○씨가 피투성이로 얼룩진 아버님을 묻어 주셨다고 몇 년 전에 증언했어요. 그분이 참 고마웠답니다. 그런데, 우리 식구들은 왜 아버님의 시신조차도 거두지 않았을까요? 이 일만 생각하면 화가 치밀고 이해가 되지 않아요.
이승만 정부는 공산주의 사상자나 좌익 활동을 했던 자가 전향해 자수하거나 나라에 충성할 젊은이들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켰어요. 취직을 시켜주고 고무신도 준다니 무엇인지도 모르고 가입한 거예요. 이장들이 자기도 모르게 가입시킨 경우도 있었어요. 야무진 청년들은 모두 가입하거나 가입 당한 것이지요. 부길이 삼촌도 그랬을 거예요. 전국적으로 30만 명에 이르렀다지요. 한국전쟁이 터지자 한 달 뒤, 이승만 정부는 각 군에 100 명씩 사살하도록 명령을 내렸던 거예요. 7월 22일 영암경찰들도 새파란 젊은이들을 포승줄로 묶어 트럭 10대에 싣고 차내마을 뒷산으로 데리고 가 총살했어요. 삼촌이 참사당했어도 우리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식구들은 쉬쉬했다지요. 그렇게 조심했어도 소문은 아버님을 희생시켰고, 나머지 식구들도 위험했을 거예요. 그래서 할아버님은 “네 아버지 시신은 절대로 찾으려 하지 말고, 그 일을 알려고도 하지 말거라.”며 당부하셨어요. 제 인사기록카드에는 ‘부역자 가족’이란 빨간딱지가 붙어 다녔고, 요주의 인물로 분류되어 감시당하는 공직생활을 했어요. 살얼음판이었죠.
그리운 아버님! 그 작년 11월 18일 영암군유족회장으로 제6회 합동 위령제를 모시면서 희생자 931명의 위패를 걸고 제가 초헌관으로 첫 잔을 올리고 고개를 드니 눈앞에 삼촌과 아버님의 성함이 보이지 뭡니까. 아버님 얼굴을 뵌 듯, 가슴이 찡했어요. 눈물이 핑 돌았어요. 저를 보시며 “아들아! 고맙다. 잘 흠향(歆饗)하마, 네가 주관이 되어 장만한 제물이니 친구 영령들과 잘 나눌 게. 참 대견하구나! 아들아, 장하다!’ 하셨어요.
보고 싶은 아버님! 아버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 동네 할머니들께 여쭈니 목소리나 얼굴이 영락없이 아버님을 닮았다고 하던데요. 아버님은 짧은 신혼생활 중에서도 저에게 귀한 생명을 주시고 지혜와 슬기를 유산으로 남겨 주셨으니 정말 감사해요. 2013년, 43년간 교직을 무사히 끝냈고, 착한 여자를 만나 어머님도 잘 봉양했어요. 기제사도 잘 챙겼고요. 가난한 가정도 잘 이끌었어요. 제 뒷바라지도 잘 했어요. 자녀도 4남매를 두어 모두 필혼시켰어요. 좋은 집도 사서 관리하며 행복하게 살아요. 며느리가 시아버님이 불쌍하다며 그리워하기도 해요. 10년 전, 큰 삼촌의 진실을 규명하여 법정투쟁으로 삼촌 피 값을 받았어요. 우리 집, 작은집, 고모님과 의논 좋게 배분했어요. 아버님 돌아가신 일은 진실을 규명해 결정 판결은 받았으나 배·보상은 아직 해결하지 못했어요. 소멸시효에 걸렸어요. 앞으로 제가 해낼 거예요.
이런 일을 해본 경험을 살려 8년 전부터 영암군유족회 부회장으로 유족들을 돕다가 4년 전부터는 유족회장직을 맡아 회원들을 관리하고 있어요. 지금도 시간이 나면 고향에 내려가서 유족들을 만나 진실규명에 필요한 공증자료 만드는 일, 진실규명신청서 작성하는 봉사활동을 며느리와 함께 하고 있어요. 금년 1월부터 사단법인 승인을 얻어 사무실을 열고, 400여 가정의 신청서를 작성, 제출했어요. 희생자는 700명이 넘어요. 20대 국회에서 작년 5월 20일 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12월 10일 행정안전부로 이관되어 앞으로 2년간 신청서를 받아 4년간 조사위원회에서 진실을 규명할 거예요.
불민한 저희 부부가 힘 닿는데까지 최선을 다하여 고향의 유족들의 손발이 되어 드릴 거예요. 아버님! 어머님과 함께 부디 영면하시기를 빌어요. 5월에 영암에서 불초 소자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