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꿰뚫는 안목
이순신이 서른둘에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국경수비 임무를 맡던 중, ‘녹둔도 전투’를 하게 된다. 여진족을 막기에 수적 열세를 판단해 지원군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지만 지원군을 보내겠다는 뜻을 보인 이경록을 만나러 간 사이에 여진족 습격을 받아 참패를 당한다. 적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비겁하게 자리를 피해 패전했다고 임금은 이순신에게 백의종군의 형벌을 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별동대 침투작전을 세워 이일의 지원군과 함께 쾌승을 거둔다. 이순신은 백의종군의 벌은 사면되었지만,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만큼 힘든 일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장군은 1591년 ‘전라좌수사’로 임명되어 수군을 정비하고 일본과의 전쟁에서 바다를 지키는 일이 중요함을 깨닫고 차근차근 수군의 힘을 길러간다. 조정에서는 서인과 동인이 사사건건 다른 생각을 하며 오로지 당리당략에 혈안이 된다. 일본의 침략여부가 논쟁거리였다. 임금, 신하, 세자, 경상우수사, 전라좌수사, 휘하 장졸들도 전쟁을 보는 안목은 각기 달랐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현해탄을 넘을 때쯤, 이순신은 일본침략에 대비해 노심초사하다 귀선(龜船)을 창안한다. 대단한 아이디어 작품이었다. 처음에는 모든 장군들과 병사들이 ‘나대용’의 공상(空想)이라 비웃지만 거북과 고슴도치의 생김을 상상하여 배를 제작하려는 부하를 인정하는 이순신의 탁월한 혜안이 번득였다. 심혈을 기우려 건조한 첫 작품이 실패하여 탄핵의 핍박을 받지만 해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거북선을 건조하려는 이순신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고의 전환이었고 콜럼부스의 아이디어와 진배없었던 것이 아니었나?
당시 부산진과 동래성을 점령한 왜적이 계속 북상하자, 이에 당황해 남해 앞바다에 피신해 있던 원균의 구원 요청으로 옥포해전을 벌려 왜선 26척을 격파하는 승리를 거두게 되어 이순신이 종2품 가선대부 상찬을 받았던 전공을 두고도 보는 시각은 달랐다.
세계 4대 대첩의 하나인 ‘한산대첩’에서는 적진을 면밀히 탐색하고, 지세와 조류, 바람, 배의 특성, 무기의 특징을 살리는 탁월한 전법이었다. 적을 유인하여 학이 날개로 먹이를 감싸며 머리를 쪼아 대는듯한 학익진 포위작전을 벌려 59척 배와 일본군 6천여 명을 격파해 임진왜란을 수세에서 공세의 국면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한 셈이었다.
부산진 공략 해전을 명령받고 도저히 승산 없는 싸움이기에 참전을 미루다가 결국, 삼도수군통제사의 직책을 하사받고 육해합동작전으로 학익진법, 장사진법, 일자진법 작전 등을 세우며 대승한다. 전쟁 중에 수군들의 명령체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무과시험을 좌수영에서 치루며 반상을 구별하지 않고 시험과목을 해전 실기위주로 치룰 결심을 굳히니 입금은 크게 노하여 세자와 윤두수를 보내나 뜻을 굽히지 않음에 그 연유를 세자에게 묻자 “세종대왕은 천민 장영실을 인정하고 기용해서 혁혁한 과학기술의 발전을 가져왔지 않았습니까?”라고 진언해 세자가 자기보다 영민함에 감탄하여 이순신 생각대로 무과시험을 치르게 하여 군관을 임명했다. 세상 보는 안목에 감탄한 수군들은 더욱 혼신을 다해 강력한 수군체제를 갖춘다.
군막에 역병이 번져 1천여 명의 장졸들이 쓰러짐에 군량으로 약제를 구입하여 치료에 최선을 다하지만 감당할 수 없음에 임금께 바치는 진상품까지 약제 구입에 사용하겠다고 한다. 장군의 목숨이 위태롭다고 여러 장수들이 만류하였지만 그는 자기의 목숨을 내놓아도 좋으니 자기 판단에 맡기라고 했다. 임금보다 숨져가는 군졸들의 생명을 더 중시했던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귀한 대접받을 권리가 있음을 간파했던 장군이었으니…,
이순신은 연전연승을 기록하고, 49세의 나이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1597년 선조로부터 파직을 당하고 역모 죄로 갖은 모독과 고문으로 죽기 직전에 파죽음이 되어 백의종군으로 군영에 보내졌다. 한편, 원균은 임금의 잘못된 명령임을 판단하고도 줏대 없이 무모하게 출전하여 300여 척의 배와 수많은 수군들을 물귀신으로 만들고 적의 칼 앞에서야 자기 잘못을 시인하는 어리석음을 보였으니 후대의 역사는 그를 어떻게 평가할까? 선조 임금만이 이순신과 같이 그를 1등 공신으로 생각했다면…,
패전하고 남은 12척의 배로 왜군 333척에 대항할 생각이라도 할 수 있었겠는가? ‘필사즉생(必死則生)’ 죽기를 각오한 싸움에 이순신은 울돌목의 수로가 협소하고 물살이 거센 점을 이용해 수중에 여러 가닥의 철사를 꼬아 만든 철삭으로 수로를 막고, 은폐를 위해 부녀자들이 강강술래를 부르며, 전선들이 일자진을 형성해 집중 함포사격을 하여 왜군을 전멸시켰던 역사에 길이 남을 명량해전. 23전 23승, 쫒기는 왜선을 겨냥한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갑옷도 벗은 채, 총탄을 맞고도 “전세가 급하니,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기며 숨져 간 이순신의 충심을 조선이 마음속 깊이 새겼더라면 36년,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는 치욕을 또, 당하지 않았을 것을…,
‘내 비밀을 알려줄게. 매우 간단해. 마음으로 보아야만 제대로 볼 수 있어.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거든.’ 동화 어린왕자의 한 구절이다. 전쟁 전후에 동인·서인, 임금·세자, 원균·이순신의 가장 큰 차이점은 눈에 보이는 사실과 숨은 진실을 찾는 안목에 있지 않았을까.
-4월 28일 충무공탄신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