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인박사는 마한이 가장 꽃피울 때 일본에 건너갔다

■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 (155) 마한과 왕인박사​​​​​​ 

2020-12-11     박해연
'백제문'과 ‘왕인묘’  일본 오사카 시에서 동북쪽으로 32㎞ 떨어진 오사카부 히라카타 시에 위치한 왕인박사 묘와 백제문. 2006년 10월 한일 양국 문화친선협회가 건립한 백제문에 들어서면 ‘오사카부 지정 사적 전왕인묘(傳王仁墓)’라고 씌여진 작은 비석이 서 있다. 왕인박사는 1600년 전 천자문과 논어를 갖고 일본에 건너가 아스카문화의 시조가 되어 여러 곳에 유적이 남아 있다.

전남도에 ‘마한팀’ 직제 필요

지난 11월 27일 광주에서 왕인연구소가 주관하는 ‘영암 마한 고분의 조사성과와 활용방안’이라는 주제로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코로나19가 재차 창궐하는 엄중한 상황에서도 왕인박사의 활동을 찾아 영암과 한국사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왕인현창협회 회원과 영암인의 열기는 세미나장을 달구었다. 특히 세미나를 주관하기 위해 서울에서 일부러 내려온 전석홍 왕인현창협회 회장님의 열정이 왕인 연구를 실증적으로 이끌고 있다고 본다. 

가끔 필자에게 격려 전화를 해주시는 전석홍 회장님과 행사 시작 전에 마한사 연구와 관련된 얘기를 나누었다. 회장님께서는 전남 지방의 마한사 연구를 행정적으로 지원할 콘트롤 타워를 전라남도 직제 안에 설치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해주셨다. 사실 전라남도청 직제에는 마한 관련 행정업무를 전담하는 조직이 없다, 다만 문화자원과의 문화정책팀에서 마한 행정업무를 부수적으로 다루고 있을 따름이다. 전남 22개 시군은 물론이고 광주광역시까지도 마한의 전통이 깃들어 있다. 따라서 전남 전 지역의 마한사 발굴, 조사, 연구, 복원 등을 지원하는 행정기관이 별도로 있어야 일을 추진하는 데 효율성과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 기회에 전라남도에 마한 관련 업무를 지원하는 ‘마한과’의 신설을 거듭 촉구하는 바이다. 

이와 관련하여 마한의 심장인 영암군도 마한팀을 신설하여 마한 업무를 체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인접 나주시는 최근 마한팀을 신설하여 본격적으로 마한 관련 업무를 추진하고 있음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마한을 강조하면 상대적으로 왕인박사의 중요성이 소홀히 다루어지지 않을까 염려하는 분위기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왕인은 기본적으로 마한인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마한연구 조사와 왕인 활동 연구는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어 상생효과가 나오리라고 믿는다.

전석홍 회장님께서 필자의 최근 마한 글이 약간 어렵다고 말씀해주셨다. 최근 필자가 전남의 22개 시군의 마한 유적·유물의 실상을 소개하다 보니 그 지역에 대한 이해나 유적·유물에 생소한 독자들에게는 어렵게 느껴진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기회를 빌어 마한의 중요 유적지 이름이라도 살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하는 의도에서 시도하고 있다. 독자 여러분의 이해를 바란다.

가야사와 마한사의 차이 

지난 호에 보성 지역의 마한왕국으로 득량 지중해 연안의 초리국과 보성강 유역의 비리국을 다루었는데, 지난 금요일 보성 조성지역에 출장을 가다 벌교 마동지역 이정표를 보았다. 마동은 지석묘가 밀집되어 옛 마한 중심지라고 필자가 주장한 바로 그곳이었다. 현지를 다른 일로 가다가 익숙한 이름을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전남 곳곳에 마한 유적·유물이 산재해 있다. 이 지면이 단순히 영암, 영산 지중해를 넘어 한국 고대사의 뿌리인 마한사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12월 2일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가 주관한 영산강 유역 마한역사문화권 조사연구를 위한 마스터플랜 수립연구 최종 보고회가 열렸다. 이처럼 최근 마한사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그러나 다음을 보자. 

“백제는 3세기경 고이왕이 마한의 소국들을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장악하였다. 4세기 중엽 근초고왕은 왕위 계승을 안정시켰다. 또한 마한의 남은 세력을 복속시키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며, 중국의 동진과 교역하고 왜와 교류하였다.”

2020년 개정된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4세기 중엽 마한의 남은 세력을 백제가 복속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60년 동안 변함없이 교과서에 실려 있다. 광주·전남·북에 마한 관련 연구기관이 20곳이 넘고, 마한 관련 논문이 1000편 이상이 나왔다. 이러한 통계에서 알 수 있듯이 최근 20년 동안 마한사 연구 성과가 크게 축적되었다. 그리하여 6세기 중엽까지 마한 역사가 존속되었다는 주장이 나왔으나 교과서에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김해와 고령 등 경상남도에서는 2020년 가야 고분군 등 가야유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려는 보고서를 제출한다고 한다. 이러한 등재 작업준비가 2013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는 박정희 정부 때 이미 금관가야의 중심지인 김해 고분군 등이 발굴 조사된 데 이어, 김대중 정부 들어 고령의 대가야 발굴조사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교과서에 가야사 관련 내용이 한쪽 정도 들어가는 등 성과가 구체적으로 나온 결과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가야사는 이제 낙동강을 넘어 섬진강까지 이르렀다. 심지어 전북 가야라는 말이 나오고 순천·구례 지역도 가야 영역이라는 주장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지역의 마한사 연구가 무려 20년 동안 계속되었지만, 과거의 주장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고, 세계유산 등재는 꿈도 꾸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답답하다. 

필자는 이러한 결과가 초래된 데는 기본적으로 마한사 연구의 방향 설정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 여기고 있다. 즉, 우리 지역 연구자조차 아직도 공공연히 백제의 마한을 얘기하는 등 마한사 연구의 핵심이 무엇인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마한사를 이야기하면서도 전체적인 맥락은 백제의 마한사를 강조하는 형국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마한사 연구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왕인박사는 마한시대 인물
 

 

왕인박사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몇 년 전 왕인현창협회 세미나에서 왕인박사 도일(渡日) 관련 사실이 교과서에서 누락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필자가 지적을 한 바 있거니와 교과서에서 왕인박사 관련 사실이 사라지고 있다. 2020년에 새로 개정된 교과서에서도 그 경향성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왕인박사를 역사적 실재 인물이 아닌 그저 이 지역에 전승된 존재로 여겨 지역축제의 상징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다.

필자도 여러 차례 주장하고, 특히 왕인연구소에서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왕인박사의 도일 사실을 역사적 사실로 밝혀냈지만, 이 역시 마한사 연구처럼 주류 학계로부터 인정받고 있지 못하다. 심지어 우리지역 역사학자조차 마한의 실존설을 부정하는 등 왕인박사 연구의 앞날이 밝지 않다.

왕인박사의 도일시기를 대체로 AD400년 무렵으로 추정하는데 그때는 영산 지중해 마한역사가 꽃피울 때였다. 왕인박사는 백제인이 아닌 마한인으로 정리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마한인 왕인박사’로 역사적 서술을 하는 노력을 우리 스스로 하는 것이 필요하다. 실제 왕인박사의 일행을 통해 일본에 선진 마한 문화가 전래되었다. 4~5세기 영산강 유역에서 형성된 독특한 영산강식 토기가 일본에서 출토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지역 마한인의 도일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곧 일본의 토기 문화에 영산강식 토기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우리 교과서는 일본의 수에키 토기문화에 가야토기가 영향을 끼쳤다고만 할 뿐 영산강식 토기로 대표되는 마한토기가 영향을 미친 사실은 애써 무시하고 있다. 

결국 마한사와 왕인박사는 매우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이번 왕인박사현창협회에서 학술회의 주제로 영암지역의 마한 고분을 주제로 삼은 것은 지극히 다행이라 하겠다. 다만, 세미나에서 주장되는 내용이 여전히 백제의 관점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마한 연맹체라는 단어 대신에 ‘옹관고총사회’라 하여 특정의 정치체를 설정하지 않고 있는 점은 이 지역 마한 연구의 현주소를 보는 듯하여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