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의 정체성을 드러낸 영산강식 토기

2020-10-30     박해현
영산강 하류지역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는 유공광구소호(有孔廣口小壺)는 6세기 전반까지 이 지역을 대표하는 토기로 '영산강식 토기'라는 이름으로 일본까지 알려져 있다. 사진은 시종 내동리 쌍무덤과 유공광구소호(함평)..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첫 발

오는 11월 3일 영암에서 뜻깊은 행사가 예정되어 있다. 영암군이 주최하고 마한역사문화연구회가 주관한 ‘국가 사적지 지정 및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마한 역사문화 보존과 발전방안 세미나’가 영암군 청소년수련관 대강당에서 열린다. 필자도 ‘영산강 유적의 마한유적과 남해당 유적’이라는 주제로 발표하지만, 배기동 중앙박물관장, 이배용 전 이화여대 총장 등 학계의 권위자들이 기조 발표를 하는 등 영산 지중해 마한의 위상을 높이고 나아가 세계유산에 등재하려는 거보(巨步)를 내딛는 자리가 마한의 심장 영암에서 열린다는 점에서 뜻깊게 생각한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격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시종이 그 중심지이지만 영산강 유역 마한은 토착 문화를 바탕으로 고조선, 낙랑, 왜와 교류하며 그들만의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신창동 지역 출토유물에서 확인된다. 일본열도에 '영산강식 토기'라고 명명된 이 지역 특유의 토기들 역시 이 지역의 독자적 정치체의 존재를 알려준다.

3세기 무렵부터 이중구연호나 광구평저호, 호형 분주 토기 등이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고, 심지어 호형 분주 토기는 금강 이남지역까지 출토 범위가 넓혀지고 있다. 남부연맹 세력권과 이들 출토 토기의 범위가 일치하고 있다. 4세기 후반에 나타난 경질의 양이부호·광구소호·장경소호, 5세기에 나타난 유공광구소호 등이 영산강 유역의 특징 있는 토기이다.

특히 영산강 하류지역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는 유공광구소호(有孔廣口小壺)는 6세기 전반까지 이 지역을 대표하는 토기로 '영산강식 토기'라는 이름으로 일본까지 알려져 있다. 지금도 영산강 유역 고분에서 이 토기는 계속 나오고 있다.

5세기 중엽 일본 하니와의 영향을 받은 통형 분주 토기가 토착적 특징을 보이면서 6세기 전반 무렵까지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형 고분과 신촌리 9호분 등 여러 대형 고분들에서 사용되고 있다. 원통형과 상부에 나팔부가 있는 호통형이 조합을 이루고 1∼2줄의 돌대가 돌려지며 3∼4개의 투창이 뚫린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토기는 백제 지역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영산강식 토기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영산강 유역에서 5∼6세기 무렵에 유행한 토기들이 백제 지역에서는 아예 보이지 않거나 설사 보인다고 하더라도 형식적인 면에서 구별되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백제에서 주류를 이룬 유개고배, 전형적인 직구단경호, 통형 기대 등이 6세기 무렵에 이르러 영산강 유역에 소량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영산강식 토기들이 지닌 독자적 특질은 적어도 6세기 전반 무렵까지 유지되고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영산강 유역 정치체들은 토착적인 전통을 바탕으로 다양한 외래문화를 폭넓게 수용하여 독자적 특성으로 녹여냈다. 외래계통 토기 가운데 가야 지역에서 나타났던 광구소호, 약간 늦은 장경소호, 승문 타날문 단경호 등이 서남해안 지역에서 4세기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5세기 전반 무렵에 영암 등 영산강 하류 지역으로까지 확대되며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 가운데 대각이 달린 소가야 계통의 대부호는 토착적 전통으로 뿌리내렸다.

이 지역의 가야와 관련된 자료는 4∼6세기에 걸쳐 금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대가야 등으로 계통을 달리하여 나타났고, 점차 기종이나 형식이 토착화되는 경향을 알 수 있다. 영산강 유역 마한 연맹체들은 가야 연맹체와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으며, 외래문화를 고유의 전통으로 발전시켰다는 것을 살필 수 있다. 나아가 영산강 하구에서 점차 내륙 방면으로 확장되는 방향성을 살필 수 있어 남원 방면에서 영산강 상류 쪽으로 유입되었다는 일부 주장과 배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6세기 무렵 영산강 유역에는 가야계와 왜계 심지어 신라의 성격이 많이 찾아지고 있으나 백제의 흔적은 뜻밖에도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나주 신촌리 9호분 출토 유물에서도 백제계보다는 왜계, 가야계 문화 요소가 많이 보인다. 영산강 유역이 이미 기원전부터 낙랑과 가야, 왜를 연결하는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과 연결이 된다. 반면 백제의 흔적이 6세기 이전까지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은 마한 남부연맹과 대치하고 있던 백제가 이 무렵까지 한반도 서남부 일대에 거의 진출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해준다.

통일성과 분립성의 상징 영산강식 토기

영산강식 토기의 특징적인 유물들이 주로 영산강 유역의 본류, 지류와 더불어 고창, 해남 지역 일대에 집중되어 있다. 해남반도 일대의 ‘침미다례’, 영산강 본류에 속한 영암 시종과 반남 지역에 있는 ‘내비리국’, 신창동·월계동 지역에 위치하여 일찍이 한 군현, 가야 등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던 마한 남부연맹의 핵심 세력이 있었던 곳이다. 이곳 출토 개배, 유공광구소호와 무개고배, 분주토기들은 지역적으로 통일성을 갖추고 있다. 개의 드림부나 배의 구연부 끝이 뾰쪽하게 끝나는 모양은 영산강 유역권의 공통적 특징이다. 이들 지역이 동일한 정치체를 형성하고 있는 증거이다.

그런데 이처럼 공통된 특징을 보이는 토기들이 영산강 상류, 중류, 하류 등 지역에 따라 약간 달리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유공광구소호 또한 지역에 따라 저부 형태가 원저, 평저, 말각평저 등으로 구별되고 있다. 즉 상류=월계동식, 중류=복암리식, 하류=반남식으로 특징을 분류할 수 있다.

이는 같은 영산강식 토기라 하더라도 각 지역의 실정에 맞게 변형을 가하여 사용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려준다. 이러한 차이는 그 지역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별도의 연맹체들이 성립되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 지역이 신창동 유적과 월계동 전방후원형 고분이 있었던 월계동 지역, 복암리 구분군, 신촌리 9호분으로 대변되는 대형 고분이 있는 반남지역 등 영산강 유역에서 비교적 큰 정치체가 있었으리라 추정되는 곳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다. 영산강 유역의 마한 남부 연맹체들이 비록 같은 연맹체를 결성하였지만, 독립적 성격을 지닌 전형적인 연맹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발형기대나 통형분주 토기의 무늬나 형태에서도 영산강 상류와 하류의 양상이 구분되고 있다. 개배나 유공광구소호의 형식, 분포 범위에서 영산강 하류지역의 시종천 일대에서는 그 차이가 뚜렷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미약하다. 이처럼 영산강 하류지역 토기에서 토착적 특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은 그 지역의 정치체가 다른 지역보다 훨씬 강고한 토착 세력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는 시종천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했던 영산 지중해 대국 '내비리국'이 오랫동안 세력을 유지한 것과 관련이 있다. 이 지역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토착적 전통을 바탕으로 강한 정체성이 형성되어 있었다. 백제적인 특성이 깃들어 있는 개배가 영산강 상류보다 하류지역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않고 있는 점도 이 지역이 마한 남부연맹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영산강 유역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공통된 특질과 더불어 세부적으로는 약간의 차이가 나타난 현상은 이처럼 마한 남부연맹 구성원이라는 정치적 특징을 반영함과 동시에 독자적인 성격도 아울러 지닌 연맹국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들 토기에서 통일성이 많이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은 다른 연맹체를 압도할 강력한 연맹체가 존재하지 않고 분립성을 유지하며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규모가 비슷한 연맹체들이 고유의 토착성을 바탕으로 공통의 문화를 공유하며 마한 남부 연맹체로서의 유대감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을 출토 토기들이 말해주고 있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