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서면 모정마을(20) - <96>
전라도 관찰사 김병교의 명 판결을 기념해 만든 철비
일제 수탈피해 땅 속에 보관한 문화재급 방치 아쉬워
2009-11-30 영암신문
영암에서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한 철비(鐵碑)
<철비 앞면>
觀察使 金公炳喬 永世不忘碑 (관찰사 김공병교 영세불망비)
沓?灌水 明於訟0 堰實屬衆 久而益頌 (답궤관수 명어송0 언실속중 구이익송)
<철비 뒷면>
丁巳五月日茅亭民人立(정사오월일모정민인립)
앞면의 비문을 살펴보면, 논에 물대는 것과 관련하여 방죽(모정 저수지)이 모정마을 주민들에게 속한다는 명판결을 내린 것에 대해서 두고두고 칭송하겠노라는 내용이다.
뒷면에는 이 철비를 세운 주체와 연도가 적혀있다. 정사년(1857년) 5월에 모정마을 주민들이 세웠다는 내용이다. 152년 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전라도 관찰사가 개입을 하고 또 마을 주민들은 그의 공덕을 기리는 철비를 세웠을까 몹시 궁금해진다.
선산 임씨들과의 소유권 분쟁
모정 저수지 바로 곁에 거주하는 김학수(87)씨는 그 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원래부터 이 저수지가 이렇게 수심이 깊은 것이 아니었어. 내가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저수지 양쪽 끝을 걸어서 다닐 정도의 깊이였지. 일제시대 말에 저수지 둑을 돌로 쌓아 높이는 과정에서 수심이 깊어졌제. 원풍정을 지을 당시만 해도 이 방죽의 원형이 그대로 살아 있었지. 빙 둘러서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줄지어 서있었고, 언덕 아래에는 커다란 너럭바위들이 물속으로 몸을 담그고 있었어. 그 당시는 바위 위로 걸어서 방죽 끝을 왕래했었제. 쌍취정 터 앞에는 기역자 모양으로 생긴 기묘한 바위 하나가 입석처럼 서 있었지. 그런데 언둑에 석축을 한다고 일본사람들이 그 바위들을 모두 폭파해버렸지. 그래서 지금 저수지 한쪽 언덕이 깎아지른 절벽처럼 되어 버린 것이여. 그대로 놔두었으면 아주 멋진 풍광을 자랑하고 있을 텐데 말이여.
이 저수지 소송으로 말미암아 300년 가까이 호숫가에 자리하면서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발길을 끌었던 쌍취정(雙醉亭)도 결국 이웃 마을인 서호면 엄길리로 이전되고 말았다. 엄길마을로 이사간 쌍취정은 현재 ‘수래정’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마을의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이설(移設) 과정에서 담헌 이하곤 선생의 기행문(남유록)에 묘사된 쌍취정의 원형은 다소 손상되었지만 그래도 당당하고 고풍스러운 쌍취정의 흔적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철비에 비각(碑閣)세워 보호해야
이 철비는 원래 알춤사장으로 통하는 원풍정 계단 쪽 공터에 세워져 있었는데 기단이 없어서 자꾸 넘어지곤 했다. 10여 년 전에 마을 동계에서 현재의 위치에 기단을 세우고 철비를 옮겼다. 하지만 비각이 없어서 비바람에 온통 노출되어 있다. 김상재(58) 이장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영암군에 하나밖에 없는 철비인데다 19세기 중엽 농촌사회의 단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를 이렇게 방치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비바람을 맞아 녹이 슬어 퇴색되어 가고 있다. 철비를 원래 자리로 이전하고 비각을 세워 보호를 해주면 좋겠다. 요즘 각 지역마다 스토리텔링을 주제로 한 관광자원을 개발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봐도 김병교 공덕비는 참 좋은 소재이다. 비각 앞에 이 철비가 세워진 내력에 대한 설명을 새겨 놓는다면 원풍정을 방문하는 여행객들에게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를 제공해줄 것이다.”
한편 철로 이루어진 이 공덕비가 어떻게 일제시대를 견디어 내고 여기까지 왔는지 몹시 궁금하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당시에 민가에 있는 놋쇠 그릇과 숟가락까지 강탈해 갔었다. 이 철비를 보았다면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을 것이다. 동네 어른들 말을 들어보면 일제의 수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이 철비를 땅 속에 묻어서 보관했다고 한다. 그 당시 지혜로운 어른들의 관심과 수고가 없었다면 이 철비도 여기에 이렇게 서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뒤에 올 후손들에게 이 소중한 문화유산을 온전하게 전수할 책임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있다.
글/사진=김창오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