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이 서린 한대리, 6.26 이후 3개 마을만 남아
젊은 화가가 머물다 간 영암남초등학교 잡초만 무성

 

         ##산 속에 들이 있는 평촌

산중에서도 비교적 너른 들을 갖고 있는 평촌마을 전경. 오른쪽 아래사진은 한 대리 마을입구를 알리는 표지석.
한대리는 영암읍에서 동쪽에 있는 산간 오지 마을이다. 이곳을 가기 위해서는 강진군 옴천면 신월마을이나 농덕리 둔덕마을에서도 갈 수는 있지만 길이 좁고 험하다. 큰 길로는 영암읍에서 819번 지방도를 타고 금정방면으로 갈 수 있다. 여운재에서 2·5Km쯤 내려가면 우측으로 장흥방면 길이 나온다. 2Km를 더 가서 13번 국도를 따라 6Km를 가면 장흥군 유치면의 경계에 한대리가 있다. 오지 중의 오지인 셈이다.

 

이곳은 영암읍에서 눈이 가장 많이 내리고 겨울에는 매우 춥다. 그래서 찰 한(寒)자와 큰 대(大)를 써서 한대리(寒大里)라고 불린다. 뒷산에서 내려온 하천 물은 깨끗하고 차가워서 여름에도 시원하다. 둔덕재 밑에 있던 광대동(廣大洞), 각동 동북쪽 골짜기 안에 있던 내촌(內村), 각동 서북쪽 골짜기의 서당동(書堂洞), 상촌 서쪽 골짜기에 있던 신사동(섭적골) 등은 6·25때 동네가 없어지고 평촌, 상촌, 각동 등에서 33가구가 살고 있다.

 

평촌은 가장 큰 마을로 너른 들이 있어 평촌으로 불려졌다. 입구에 ‘한대리 국보966 옛날두부本家’라는 음식점 입간판이 눈길을 끈다. 그래서 주인에게 물었다. 966은 1966년부터 시작했다는 의미란다. 재를 넘다보면 한번쯤 쉬어갈만한 집이다. 역시 장사가 제법 잘된다고 한다. 음식점 옆의 낡은 다리(한대교)를 지나면 지금은 폐교가 된 영암남초등학교가 눈에 띈다. 한 아주머니는 “70년대 초까지 징검다리였는데, 사람이 건너다 물에 휩쓸려 죽은 후에야 다리가 만들어졌다”며 한대교가 만들어진 사연을 전해준다. 이제는 이 다리도 낡아서 난간은 부서져 나가고 없다. 우측으로 300m정도를 가면 마을회관이다. 회관 앞에는 정자가 있고 주위에는 오래된 나무 10여 그루가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

 

김씨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연세를 물으니 28년 무진생이라고 말한다. 피부는 햇볕에 탓지만 머리카락이 검다. “평생 염색을 한 적이 없다.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을 마시며 산 덕분인 듯하다.”고 말한다. “90년대 초까지도 유권자가 400명은 족히 되어 영암남초등학교에서 투표를 했다. 이제는 인구가 많이 줄었다.”고 덧붙이신다.


         ##애환이 서린 영암남초등학교

김씨 할아버지는 “지금은 폐교가 된 영암남초등학교는 해방 후 자녀들을 위해 마을대동계에서 논 7마지기를 내놓고 주민들이 울력을 하여 만든 학교인데 자료가 없다하여 교육청의 소유로 되었다.”며 한 숨 짓는다.

 

“몇 년 전에는 한 화가가 이곳 학교에 와서 화실을 차리고 이른 아침이나 초저녁이면 아내와 함께 개를 끌며 산책하곤 했다.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이도 젊은데 안됐다.”며 애석해 하신다. 영암이 낳은 서양화가 이강하 화백을 두고 한 말이다. 문득 한 동네에 함께 살며 놀았던 추억이 스친다. 그림에 천부적인 소질을 가졌던 형이 60고개를 못 넘기고 세상을 뜨다니...서글픔이 복받쳐 오른다.

 

생명을 가진 존재는 언젠가는 사멸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임을 우리 인간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하루라도 더 삶을 연장하고 싶은 것이 평범한 인간의 본능이 아니겠는가?

 

예술가는 작품을 만들어 내기위해 자신의 몸과 혼을 불사른다. 작품에 자신의 열정을 바치는 삶, 일찍 죽고 늦게 가는 것이 큰 의미는 없겠지만 살아 있는 예술가들은 자신의 건강도 돌보시길, 형과 한 동네에서 함께 놀았던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영암읍 명예기자=최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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