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복전·도포면 목우동 출생·법무부 연구관·대구소년분류심사원 원장·청주미평고등학교 교장·경기대 겸임교수 역임·현)학교폭력대책 자치위원·현)수필작가 등으로 활동
나라가 얼마나 위급하였으면 임금이 개성에서 한반도의 서남단인 영암으로 피난을 하였을까? 필자는 작년 봄 형제들과 2박3일간의 제주여행을 했다. 천혜의 관광자원을 가진 제주는 세계적 관광명소인 이태리의 나폴리나 카프리 섬에 버금간다고 하면 과장일까? 한라산에 담긴 여러 설화며 유채꽃핀 들녘, 성산 일출봉을 휘돌아 가는 유람선의 바닷길 등은 몇 차례를 가보아도 다시 가보고 싶다.

그런데 이번 여행 중 아주 특이한 관광코스는 ‘해피타임’이었다. 그중에서도 말 타는 장면은 나에게 새로운 역사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말 타는 장면, 12~13세 소녀에서부터 20세미만 청소년들의 말 타는 솜씨는 예술적이요, 묘기중의 묘기라고 생각되면서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 말과의 호흡은 그렇다 치더라도 깃발을 들고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면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그 기동성이며 말위에서 60~80cm 정도 크기의 화살을 표적을 향해 쏘면 저승사자의 휘파람과 같은 소리를 내면서 표적에 적중한다. 이러한 묘기는 바로 그들 조상들이 사용했던 기마민족인 유목민족의 전술이다. 그들은 500~1000명 단위의 기마병부대로 평화스럽게 살고 있는 도시나 농촌을 기습했다. 그들이 지나가는 지역에는 살인·방화·부녀자·약탈 등으로 공포의 도가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4세기 후엽부터는 흉노족의 일부인 훈족이 북부유럽을 침략하여 로마가 멸망하게 된 원인이 되었고, 11세기부터는 징키스칸의 몽골족이 터키까지 정복하였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세계의 종말이 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유목민족들은 태어나서 걸음걸이보다 말 타는 것을 먼저 배운다. 제주 ‘해피타임’에서 말 타는 묘기를 보여준 사람들은 몽골인들로, 기마병의 전술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몽골인들은 유목민족이다. 유목민족들은 경제활동을 농업에 두면서 정착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낙타나 말·양·소 등을 기르면서 초지가 있는 곳을 따라 4계절 이동하면서 살아온 부족이다. 이들은 일정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동성이 있어야 하고, 생업이 전쟁이요, 일하는 곳이 말의 등이다.

이들은 유라시아를 거쳐 고비사막 등 물이 귀하고 척박한 곳에서 살아왔다. 가을이 되면 목초가 다되고 시들어가기 때문에 중국 깊숙이 쳐들어가 매년 약탈과 살상을 해왔다. 이들의 남침을 막기 위해 진나라 이전부터 명나라 때까지 만리장성을 쌓고 보수해왔다. 그래서 중국인들에게 가을은 공포의 계절이라는 말까지 있었다. 이러한 유목민족 중에는 우리나라를 괴롭혀온 좋지 못한 족속이 있다. 거란족·몽골족·여진족 등이 그렇다. 거란은 고려가 외교정책으로 송나라와 관계를 유지해왔는데, 이에 불만을 갖고 현종 원년인 1010년에 2차로 침략해왔다. 거란의 성종은 친히 40만 대군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개성까지 침략해왔다. 그러자 현종은 세자와 함께 피난길에 올라 다음해 정월 13일 영암군 시종면 옥야리 남해포(당시는 나주에 속함)에 도착, 현종은 남해신당이 있는 곳에서, 세자는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야산(세자산)에서 8일간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현종의 꿈에 백발해신이 나타나 “어서 일어나 몽탄으로 피신하시오”라고 재촉했다. 이 말을 듣고 즉시 강 건너 몽탄으로 피신하여 적의 공격을 피했다고 한다. 거란이 철군한 후 현종은 귀경한 다음 나주를 수도인 개경에 버금갈 만큼 우대를 하였다.

한 가지 조치로, 현종은 백발해신을 위해 남해신당을 짓고 영암·나주·해남·강진·영광·함평 등 여섯 고을 수령들로 하여금 매년 한차례 향화를 올리도록 했다. 그리고 신성함과 경건함을 갖도록 하기위해 하마비를 세우고 이를 경계로 하여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 가도록했다는 것이다.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