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홍·영암읍 출신·광주교육대학-조선대학교 졸업·전주대학교 대학원(경영학 박사)·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사업회 이사·동강대학 교수 역임·현 호남매일 수석논설위원
필자는 지난해 월출교직회에서 주관한 연중 교통정리 봉사활동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덕분에 모교인 영암초등학교를 방문하게 됐는데, 오랜만에 본 모교는 많이 변해 있었다.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된 백년관을 비롯, 컴퓨터 전산실습실과 도서관 등을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 감격스러웠던 것은 팔순이 넘으셨으나 아직도 정정하신 은사님 이상업 선생님을 봉사 활동하는 자리에서 뵙게 된 일이었다. 한편 송구스러우면서도 반갑기 그지없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지 어언 반세기가 지났건만, 소년단 대열에 끼여 ‘전우가’, ‘무찌르자 오랑캐’ 등 행진가를 부르면서 부락단장의 구령에 발맞춰 등하교하던 시절과 장마철이면 학교 앞 개천가에서 미역을 감던 때가 엊그제처럼 느껴졌다.

특히 설을 쇤 후 정월 대보름날이 다가올 무렵이면, 영암읍성을 중심으로 성안 아이들과 성밖 아이들로 나뉘어 벌였던 팽매싸움(돌팔매질)은 잊을 수가 없다. 성안은 역리, 교동리, 서남리, 동무리, 남풍리 등 5개리였고, 성밖은 회문리, 용흥리, 개신리, 망호리, 송평리에 거주한 아이들로 편성됐었다.

자칫하면, 상대편이 던진 돌에 맞아 잘못된 일이 생길 수도 있었지만 쌍방의 전술과 전략이 워낙 뛰어나 잽싸게 공격하고 도망가는 스릴을 즐겼을 뿐, 부상당한 아이들이 거의 없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뿐만 아니다. 필자가 어렸을 때는 6.25사변 직후였기에 성안과 성밖 팀으로 나뉘어 역리 범바위와 망호리2구 부춘정이 있는 부춘봉을 중심으로 고지탈환과 깃대 뺏기 시합을 벌이곤 했었다. 그러나 게임이 끝나고 난 후 다음날 학교에서 라이벌(?)간에 얼굴을 마주하면 오히려 서로 반가워하며 위로와 격려를 하는 등 사이좋게 지냈었다. 지금 생각하면, 영암사람들의 호연지기와 단결심의 원동력이 바로 이러한 놀이를 통해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월출산 자락에 ‘암탉이 부화하듯 품고 있는 영암읍성’은 1418~1450년께 축성된 이후 왜구의 침략을 방어하는 것은 물론, 6.25사변 때에는 방위군들이 보초를 서가며 북한 인민군의 영암침투를 막는 교두보 역할로서도 구실을 톡톡히 해 냈고, 아이들 놀이터의 본거지로도 친숙해 있었다.

그렇지만, 영암읍성의 오늘날 모습은 어떠한가. 한마디로 ‘흉물스럽다’고 표현한다면 지나칠는지 모르겠으나 날이 갈수록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훼손되어 가는 것을 볼 때 답답한 마음 금할 수 없다.

우선 읍성의 문화적 유산가치를 논하기에 앞서 도시개발에 밀려 점점 허물어져간 읍성을 보면서 “이러다가 장차 영암읍성의 자취마저 볼 수 없게 되겠다”는 불길한 예감으로 만감이 교차한 것은 필자만이 아니리라. 어찌하다 이 지경이 됐을까.

아마추어 성곽탐사자인 김성호선생은 “월출산 도갑사에서 구정봉으로 가는 능선에도 성터 흔적이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바, 영암군 당국은 물론이고 영암군민은 이제부터라도 영암읍성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가져 봄이 어떻겠는가.

‘동국여지승람’(1530)에 보면, “영암읍성은 둘레 4천369척, 높이 12척, 성안에 4개의 샘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비록 전북에 있는 고창읍성 만큼 복원하지는 못할지라도,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는 영암읍성의 역사적·문화적 가치만이라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잘 보수하여 후대에 물려줌이 도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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