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종렬·군서면 출신·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정치학 박사)·동아일보사(동아방송) 기자-여성동아부 차장·동신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학과장·가천의과대학교 경영대학원 원장
1960년대 초반 구림초등학교 시절 매년 봄·가을 소풍은 도갑사 뒷산으로 정해져 있었는지 매년 항상 같은 코스에 보물찾기 등 행사도 똑같았다. 그래도 항상 기다려졌던 소풍 가던길이 지금은 도갑사 밑 저수지가 있는 곳으로 나 있었는데 그 시절만 해도 저수지가 없었다. 잊지 못할 일은 소풍 가던 날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소풍 가던 날 가끔 때맞춰 비가 오는 일이었다. 지금 들으면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얘기지만 비가 오는 것은 학교 소사가 구렁이를 잡아 죽여 구렁이의 한풀이로 비가 온다는 등 해괴한 풍문이 어린시절에는 진실인양 들렸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말귀가 트이면서부터 도선국사 관련설화를 듣고 성장했는데, 소풍가던 날 선생님들도 항상 도선국사 얘기를 들려주셨다. 조금씩 표현은 달랐지만 도선국사와 풍수도참사상에 얽힌 에피소드가 유년시절 깊게 가슴에 각인되어 40년이 지난 지금도 도선국사가 전설상의 인물이 아니고 바로 내 옆에서 살아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특히 대학시절 졸업논문 주제를 고민 끝에 ‘풍수지리설을 고찰(考察)함’으로 정하고 풍수도참사상 관련자료를 찾으면서 그 분의 위대성과 광범위한 영향력을 새삼스럽게 인식하고, 고향에 대한 자긍과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최근 근거는 부족하지만 국보1호인 숭례문에 이어 정부종합청사마저 불이 나자 광화문 ‘해태’를 없애 화재가 빈발한다는 풍설이 나돌면서 새삼 풍수도참사상이 아직도 민중들의 가슴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왕조교체기나 대통령선거 때마다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후보들의 선조묘가 화제가 되고 있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한 일본인은 ‘한국은 무덤(墓)이 지배하는 나라’라는 책을 내 비아냥 댈 정도로 풍수지리설은 우리생활에 광범위하게 자리잡고 있다.

오늘도 국가적 병폐로 남아있는 일제 식민사관의 뿌리인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를 구축하면서 환인-환웅-단군으로 이어지는 민족사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 단군역사를 신화로 조작하는 등 우리나라 상고사 역사왜곡과 중요 사료를 일본으로 빼돌린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도선국사의 풍수사상을 최초로 연구한 인물로 유명하다. 경성제국대 교수로 16년 2개월 동안 조선사 편찬업무를 총괄한 그는 ‘신라 스님 도선국사에 관하여’라는 논문 서두에서 “신라말에서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천여년 동안 조선반도의 상하귀천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의 사상과 행동을 지배하는 도참풍수설의 비조로 추앙받는 도선은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국가 상징인 국보1호와 정부청사에 불이 나자 광화문 복원작업을 시작하면서 해태상을 치워 화재가 났다는 풍문이 돌아 흉흉한 민심은 광화문 해태상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 한다. 상상의 동물인 해태와 화기(火氣)진압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구체적으로 입증할 근거는 없지만 풍수학 혹은 민속학에 종사하는 전문연구자들은 화기를 막아준다고 주장한다.

해태는 원래 이름이 ’해치’로 중국과 한국에서 해태상은 법률 관장부서나 관리를 상징하는 장식물로 애용되었다. 원래 육조거리(세종로) 가운데 미국 대사관이 있는 사헌부(검찰청) 대문에 세워 정치의 잘잘못을 가리고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는 상징물이었지만 ‘불을 삼키기도 하고 뱉기도’ 해서 해태에 화기제압의 상징성을 부여할 수도 있다는 견해가 상존한다. 화기충천하는 글꼴인 숭례문 간판을 세로로 세우고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세운 것은 관악산 화기를 막기 위한 풍수조치라는 통설을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을 보면서 왕인문화축제 만큼 도선국사도 제대로 조명하고 풍수사상연구도 소홀히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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