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홍·영암읍 출신·광주교육대학-조선대학교 졸업·전주대학교 대학원(경영학 박사)·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사업회 이사·동강대학 교수 역임·현 호남매일 수석논설위원
내 고향 영암에 들어설 때, 덕진면 장산리 쪽에서 바라다 본 월출산의 모습은 언제나 자랑스럽고 미덥기만 하다. 광주에서 살아 온지가 매우 오래 됐으면서도 무등산 보다는 월출산의 위용이 더욱 자랑스럽게 느껴지고, 다른 지역의 웬만한 산을 산다운 산같이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은 소금강이라 일컫는 월출산 자락에서 자란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꿈을 꾸게 되면, 어렸을 때 살았던 영암읍 역리의 집이 배경이 되어 떠오르고 소꿉장난하던 옛 친구들의 모습들이 파노라마 되어 스치는 걸 보면, 고향에 대한 추억의 소회(所懷)는 끝이 없을 것만 같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할까, 정년퇴직을 몇 개월 앞두고 있는 요즘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절실해진다. 특히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던 역리 뒷동산 범바위가 풍수 지리적으로 좌청룡에 해당되어 관아의 북서쪽을 가려준 형국이었다는 사실과 읍내 삼거리에 있는 ‘장독걸 샘’이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읍성을 지켜낸 임란의병 양달사(梁達泗)장군의 충정이 서려 있었다는 유래를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필자는 고향을 떠난 지 수십년 만에 장독걸 샘터를 찾아가 보았다. 샘터는 매립되어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으나 원형은 아니지만, 샘의 모형이 보존되어 있었다.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그리고 장독걸 샘은 ‘장군정(將軍井)’ 또는 ‘장군천(將軍泉)’ ‘장독천’이라 불리어지고 있는데, 샘의 기념비와 함께 양달사 장군의 공적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양달사는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해남 현감을 지내다가, 1555년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관직을 버리고 시묘를 위해 고향에 내려왔다. 이 무렵 왜구들이 제주도를 노략질하고 달량진(현재 해남 남창)을 거쳐 영암읍내로 쳐들어와 3일간의 격전을 벌였을 때, 의병을 이끈 양장군이 군령기를 높이 들어 호령하고 땅을 내리치자 ‘꽝’하는 소리와 함께 군령기를 꽂았던 자리에서 물줄기가 솟았는데, 이에 군사들은 사기충천해 왜적을 물리쳤다.”는 전설이 구전되었다고 한다.

또한 “양장군은 그의 공을 관군을 이끌었던 원님(군수) 이윤경에게 돌리고 자신은 왜구의 창에 찔린 부상을 안고 3년 시묘를 마친 뒤 41세(1559년)에 세상을 떠났고, 이러한 충정이 뒤늦게 조정에 알려져 그가 죽은 지 100년 만에 좌승지로 추증되어 그의 정신을 기리게 됐다.”는 것이다.

필자는 앞에서, 장독걸 샘터의 위치와 모형이 원형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표현을 했다. 욕심 같아서는 샘터를 원형대로 복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읍성(邑城)을 지켜 낸 의병 양달사 장군의 충정에 대한 뜻을 기리는 취지라면, 공적비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양장군의 동상이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빛나지 않을까.

영암읍성을 침입한 왜구에게 항복하여 영암군 관아가 왜구의 발길에 짓밟히게 되자, “이 난리를 보고만 있을 수 없다.”며 형 달수(達洙)와 동생 달해(達海) 달초(達礎)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도포면 봉호정에서 단숨에 달려와 왜구를 물리쳤다는 공적이라면, 월출산 정기를 이어받은 호연지기의 상징성과 영암군민의 단합된 힘을 내외에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양달사 장군의 동상 건립이 추진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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