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영오·한국환경개발(주) 대표·학산면 출신·동국대학교 정치학과 졸업·경희대학교 산업정보대학원 수료·한양대학교 산업경영대학원 수료·중소기업은행 경영인협회 경기중앙회장
고향을 떠나온 지 어언 50여년... 생각해 보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세월이다.

고무신을 신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불을 때던 소년이 지금은 유비쿼터스 시스템 속에서 e편한 세상의 첨단 정보화 사회에서 생활하고, 봄이면 뒷동산에서 나물을 캐다가 저녁 반찬을 만들던 처녀가 지금은 고층APT e편한 부엌에서 가족의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세월은 흘러도 추억은 남는 것. 추운 겨울 더운 물도 없이 찬물에 빨래를 비벼 빨고 풀을 먹여 식구들 옷바라지 한 어머니, 저녁마다 호롱불을 켜 놓고 가족들의 뚫어진 양말을 꿰매준 어머니, 안방 화로에 된장 뚝배기 올려놓고 더운 밥 식을까봐 따뜻한 아랫목 요 밑에 묻어 두고 기다리던 어머니가 계셨던 내 고향은 어머니요, 꿈이요, 희망이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유배 길에 월출산을 보고 금강산 일부를 떼어 놓은 듯 그 기괴하면서도 고졸한 산의 정기가 가슴 속으로 밀려오는 듯한 그 산 모양을 글씨로 쓰고 싶었다고 한다. 달 떠오른 영암산 정기를 받아 월출군으로 애초에 작명을 했으면 자연의 조화가 더욱 어우러지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워했다고 한다. 월출산 주변을 끼고 있는 유물 유적으로 구정봉 밑에 있는 마애여래좌상, 도갑사 미륵전에 봉안되어 있는 석조여래좌상, 해탈문을 비롯하여 많은 국보, 보물, 지방 유형문화재와 민속자료들을 더욱 연구하고 보전하여 우리 고향의 문화벨트로 가꾸어야 할 것이다.

일본문화의 시조이신 왕인박사의 유적지와 풍수지리설의 선각자이신 도선국사가 태어난 곳도 월출산 주변 마을이라 한다. 전설에 의하면 모 가문의 처녀가 빨래를 하는데 오이가 물줄기를 따라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멀리 밀어 보냈지만 되돌아와서 그 오이를 먹었는데 아이가 잉태되어 수치심 때문에 대밭에 출산을 했다. 비둘기들이 그 아이를 길러 후일 그 아이가 도선국사 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 대밭이름을 비둘기구(鳩), 수풀림(林)자를 따서 오늘의 구림(鳩林) 마을이 되었다는 전설을 잊을 수가 없다.

월출산은 내 고향의 얼이요, 기상이다. 월출산에서 바라 본 영산강 물줄기는 한 폭의 그림이요, 시(時)다. 세속에 시달린 마음을 일속같이 사라지게 하고 깊은 명상에 잠기게 한다.

강줄기를 따라 지역마다 생산되는 도포의 못챙이, 숭어 어란, 해창의 맛, 태백리의 농어, 대갱이, 학산 미교의 석화, 삼호의 짱퉁이탕, 미암의 사포 낙지, 운주리, 넙석 전어구이...

그 맛들은 모두 내 고향 특유의 풍물(風物)이다. 어찌 그뿐인가? 벼가 누렇게 익은 가을에 천해들(샘바다)에서 잡은 토하 막젓에 쌀밥을 먹을 때면 세상에서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어디 있을까. 고향은 나의 자랑이요 나의 추억이다. 나는 언제까지 잊을 수 없는 고향의 향수를 달래면서 행복해 할 것이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정신으로 더 아름답고 그리운 고향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한 그루의 나무, 한 평의 땅도 소중히 여겨 10년 또는 100년 후의 비전을 상상하며 가꿔야 한다.

일찍이 노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를 통해서 생명과 자연을 내 몸같이 소중이 여기는 세상을 갈구하였다. 그러한 노자의 가르침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아니하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오늘날 환경보존과 생명존중의 모체가 되었다.

친환경 영농으로 농가의 소득을 높이고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여 귀농인구가 늘어나고 도회지 사람이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생활농촌을 만들어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고향, 가고 싶은 고향으로 후대 사람들이 두고두고 사랑하고 고향의 뿌리가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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