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홍·영암읍 출신·광주교육대학-조선대학교 졸업·전주대학교 대학원(경영학 박사)·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사업회 이사·동강대학 교수 역임·현 호남매일 수석논설위원
초중고를 영암에서 다니고, 광주교육대학에 합격하여 광주로 거처를 옮겨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이 꼭 47년 흘렀다. 그런데 근 50년 동안 광주에 살면서,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내 고향마을 뒷산의 ‘범바위’를 단 한번 가보지 않다가 최근에 가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고향을 떠난 지 47년! 범바위는 옛 모습 그대로가 아니었다. 작은 집채만 하던 큰바위는 흙더미에 묻혀 흉물스런 모습으로 끙끙거리고 있었다. 도시개발에 밀려 내동댕이쳐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필자는 내 고향 범바위에 관한 잊혀지지 않은, 옛 추억을 회상하면서 향수를 달래고자 한다.

영암읍내에서 월출산을 바라보고 있는 큰 마을이 필자의 고향마을 역리(驛里)이다. 역리 뒷산을 올라가면,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중심부분에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가 바로 ‘범바위’다. 범바위에 관한 전설적인 얘기를 자세히 들은 적은 없다. 그러나 예로부터 큰 호랑이가 동네 뒷산에서 살았었다는 이상 야릇한 얘기를 구전으로 듣기는 했었다.

6.25동란 때에는 범바위 밑에 있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 수십명의 동네 사람들이 피난을 했었는데,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렸을 때, “저 뒷산에서 호랑이가 온다.”고 겁을 주시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으름장, 그 으름장에 놀라 울음을 그쳤던 적이 많았던 것은 필자만이 아니었으리라.

범바위는 동네 아이들의 유일한 놀이터였다. 동네 아이들은 딱지치기, 자치기, 연날리기 쥐불놀이 등을 하다가, 어느 한 사람이 “범바위로 가자”고 외치면, 쏜살같이 범바위로 달려갔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선착순대로 구슬내기를 했고, 어떤 때는 범바위 중턱에서 땅으로 뛰어내리기 시합을 하면서 담력을 기르기도 하고, 집에서 기르는 닭을 한 마리씩 가져와 범바위에서 멀리 날려보내기 시합을 하기도 했다.

6.25동란 직후에는 병정놀이가 유행이었다. 동네 아이들은 아군과 적군으로 나뉘어 전쟁놀이를 곧잘 했다. 서로 앞다투어 국군이 되려 하지만, 힘센 친구가 편을 갈라놓으면 인민군에 편성됐더라도 이유불문하고 따라서 해야만 했다.

범바위는 전쟁놀이터의 본부이기도 했다. 한참동안 전쟁놀이를 하다가도 일정한 시간이 되면, 범바위로 몰려와 해단식을 거행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범바위는 동네 놀이터로서도 이름난 곳이었지만, 필자가 철들 무렵에는 월출산 천황봉을 바라보며 호연지기(浩然之氣)와 붕정만리(鵬程萬里)의 꿈을 기원하던 산실이기도 했다. 특히 고등학교 학생이던 때 범바위는 필자의 공부방과도 같았다.

범바위에서 영어단어를 외우면, 다른 곳 보다 더 잘 외어지기에 시험삼아 우리나라 헌법 조항을 외워 보기도 했었고, 대학진학을 포기해야 할 처지에 있을 때는 범바위에 올라서서 “나는 할 수 있다”고 울부짖으며 굳은 각오를 다짐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보니 어찌된 일인가? 집채만 했던 커다란 바위가 흙더미에 파묻혀 볼품 없이 되어 있지 않은가.

“땅 주인이 교회를 지을라고 땅을 고른다면서, 포크레인으로 여러 날 흙일을 하더니 범바위를 이렇게 반쯤 묻어 버렸어라우. 예전에는 솔찬히 커 보였던 범바위가 요렇게 꼴불견이 돼 버렸당께요.”

타지에서 이사와 40년째 범바위 바로 밑에서 살고 있다는 강영수(71세)씨는 범바위가 흙에 파묻힌 것에 대한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볼품없이 돼버린 범바위 옆에는 인적없는 기도원이 하나 있었고, 40~50미터 떨어진 곳에는 KT통신 기지탑이 높게 세워져 있었다.

역리만이 아니라 영암읍의 수호신 같은 범바위! 범바위는 이제 복원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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