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에서 유를 창출한 성공한 인생, 후산댁 부부근검절약으로 자식들 훌륭하게 키워…후세 ‘귀감’

 

선도농업으로 가난극복

망호리 후정부락의 강인구·조복심 부부의 생전모습. 이들은 가난 속에서도 7남매를 모두 훌륭하게 키워 주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망호리 후정부락에 들어서니 포근한 겨울을 뒤로하고, 무자년(戊子年) 새해맞이 대설을 흠뻑 둘러쓴 300년 된 큰 팽나무가 그립던 가족들을 맞이하고 있다. 큰 팽나무집의 자손들은 부모님의 얼이 깃든 보금자리에서 뜻있는 연말연시를 보내기 위한 가족모임 행사를 갖고자 경향 각지에서 눈길을 마다하고 달려왔다. 아마도 우리 모두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인연은 바로 부모와 가족간의 인연이리라! 누구나 때때로 지난날 부모님과 가족간의 값진 추억이나 부모님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애틋한 그리움에 잠못 이루고 회한에 젖곤 한다.

 

큰 팽나무집의 자손들도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바로 엊그제인 듯 선명히 각인되어 있는 부모님과의 옛 추억에 애틋한 그리움으로 회상에 젖는다.

 

후정리 강인구 선생은 유난히도 장남만을 선호하였던 선친의 슬하에서 5남매 중 차남으로 1920년 태어나 영암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강진농업학교에 재학 중인 형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서당에서 한문수학을 했다. 이후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 탄광에서 노역을 하던 중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 1942년 무사히 귀향했다.

 

부인 조복심 여사는 강진군 칠량면 송정리 부농의 집안에서 1924년 장녀로 태어나 조부의 교육관 때문에 학교는 문턱에도 디뎌보지 못했지만 육십갑자(六十甲子)는 훤하고 사소한 일까지 정확히 기억할 뿐 아니라 석·박사인 자녀를 능가하는 뛰어난 지능을 갖춘 분이었다.

 

두 분(나중에 후산댁)의 신혼생활은 마을 중심에 위치한 대문안댁 문간방에서 품팔이로 시작되었다. 이후 슬하에 4남3녀를 두고 자녀교육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농한기와 밤에는 새끼를 꼬고, 무명베를 짜서 살림을 불려나갔다. 배마태에 있는 문중소유의 토담집으로 이사한 뒤에도 부근 화물선의 하역작업에도 뛰어들어 5년 만에 1천평의 논을 장만했다.

 

자신의 토지를 갖게 되자 퇴비를 만들어 지력을 높이고 농사법을 개량하여 다수확 농사를 선도해나갔다. 별을 보고 들에 나가 달을 보고 귀가하는 세월이 수년간 이어지다보니, 큰팽나무집도 소유하게 되었다. 1960년에는 비로소 4천여 평의 농경지를 소유한 부농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 내외는 자신의 안위 보다는 자식들의 교육에 더욱 혼신을 다했다. 자녀들의 학비라면 어렵고 고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7남매 교육에도 혼신

그러나 7남매의 교육비를 감당하기에는 쌀·보리농사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일찍이 원예·채소재배에 눈을 돌리고 일본 농업서적을 구해 밤낮으로 공부했다. 토질을 개량하고, 그에 맞는 우량품종을 구하여 온상재배 및 터널재배법을 도입했다. 밭 700여 평에는 배추, 오이, 토마토, 호박, 당근, 생강, 대파 등을 생산하면서 또 1천여 평의 밭에는 배, 사과, 복숭아, 감 등 과수를 심어 미래를 대비했다.

 

그리고 추울 때나 더울 때, 궂은 날씨를 가리지 않고 달빛, 별빛을 벗삼아 가며 1등 상품을 만들어 냈다. 이윽고 영암읍 5일시장, 매일시장에서는 후산댁 채소만 찾게 되었다. 이처럼 채소가 인기리에 고가에 팔리게 되자 이들 부부는 새벽 3~4시부터 채소를 머리에 이고, 리어카에 싣고 2km가 넘는 백년동 가파른 고갯길을 하루에도 몇 번씩 넘나들면서 배달하기를 수년째 되풀이했다. 결국 이들 부부는 일찍이 채소, 과일농사로 고소득을 창출하는 새 농민상이 되었다. 그리고 항상 몸에 밴 근검절약의 생활 때문에 음식점 등에는 가서는 안될것인 양 여기고 맛있는 음식 한번 변변하게 먹어보질 못했다. 더구나 외국여행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무에서 유를 창출한 일생, 그리고  7남매 모두를 고등교육을 시켜 성공한 인생으로 마을에서는 각인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잠시 멈춘 듯 고즈넉한 옛 정취를 간직한 큰 팽나무집에서 7남매는 부모님의 애틋한 정이 스며온다. 부모님의 근검절약하는 습관이 이제는 자신들의 몸에 배여 생활력이 강하게 만들어 살아가고 있음이 언뜻 부모님 모습인 것을 깨닫게 된다. 모두가 우수한 성적으로 국립대학을 졸업하고 모범적인 사회생활과 유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던 밑거름은 오직 부모님께서 몸소 보여준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그분에게 한없는 존경심과 감사한 마음 끝 간 데 없다. 그리고 후산의 자손이라는 긍지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렇지만 회한으로 남는 건 일에만 묻혀 사시던 후산 선생께서 회갑을 갓 넘기자 갑작스럽게 영면하시고, 부인마저 수년 전 손쓸 겨를도 없이 세상을 뜨니 천붕지통(天崩之痛)의 아픔이 가실 날 없다. 무자년 새아침, 자손들은 큰 팽나무집 뒷동산에 모신 부모님 산소에 머리숙여 기도하고 있다. 활성산 너머 국사봉 위로 찬란한 해가 떠오른다.    /명예기자단 자문위원=서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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