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호천 따라 펼쳐지는 풋풋한 추억 ‘생생’아버지가 만들어준 지게에 고단한 삶 얹혀

 

망호리2구 마을 앞을 가로지르는 망호천 주변 갈대가 월출산과 어우러져 고향을 떠나 있는 향우들에게 옛 추억을 속삭여 주고 있다.
월출의 하늘 아랫마을 10월 상달은 보름달 빛이 유난히도 밝다. 그래서 이 마을 할머니들은 그 달빛에 바늘귀도 꿴다 하였던가?


몇 년을 벼르고 벼르다가 입향조 할아버지의 시제(時祭) 날에 맞추어 고향에 내려왔다는 노부부는 시제에 참례하고 음복주 서너잔과 고향의 정취에 젖은 듯, 그래서일까 잠시나마 향수에 취해봄이 어떨까? 그러자니 자연 취운(翠雲) 이원우 할아버지의 시가 떠오른다.


호수와 산 푸르름 쌓여 숲을 이루니

그 가운데 띠집있어 지경이 깊숙하다.

들 형세는 연기 읊어 처마 밖에 넓고

샘물소리 비를 비지노라 베갯머리에서 읊누나

손자 데리고 마을길에서 걸음마를 익혔고

손님 맞아 잣나무 그늘에서 책을 보았어

쉬는 날 없이 오가는 것을 누가 알손가

주인의 마음을 구름은 응당 알거야.

 

월출산 아래 호월정 

마을 골목길을 벗어나 4차선 큰 길에 이른다. 구름에 쌓여 있다가 갑자기 우뚝 솟아 눈앞에 다가오는 안개속의 천황봉의 신령스러운 모습과 그 위 떠오르는 보름달의 자태. 항상 그 모습을 보면서 살았을 망호정 사람들은 소랏태 쉼터에 팔각정을 짓고 ‘호월정(湖月亭)’이라 현판을 내걸었다. 길손들이여 사양하지 마시라, 언제라도 좋으니 잠시 호월정에 들리시면 허허로운 가슴에 월출산의 화기를 보강해 물과 불이 이상적으로 배합된 수화기제(水火旣濟)를 이룬 이곳에서 마음 구하시리라. 호월정에는 여덟면에 유리창을 둘러 밤에도 늘 마을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러나 노부부는 호월정에 머무는 것만으로 성이 차지 않은 듯 그 앞에 펼쳐진 달 아래 들녘으로 발길을 향한다. 달빛을 기다리는 갈대들이 망호천변 풀길 따라 숲을 이루었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눈꽃송이들이 갈대 위에 수북이 앉아 있는 듯 가을 들바람에 부딪치는 스산한 산조(散調)가락이 노부부의 마음을 회상에 젖게 한다.

 

개울가에서 피라미와 개구리를 잡다가 옷이 젖거나 한겨울 썰매를 지치다 얼음이 깨져 논물에 적신 양말을 말린다고 감나무 삭정이를 주워 모아 불을 피우다 무명 버선을 태워 먹었다고 무섭게 혼을 내던 어머니가 미치도록 보고 싶습니다.

 

덩치가 크다고 내 체형에 맞게 지게를 만들어주시던 산에서 나무를 하다말고 멜빵 길이를 맞춰주시던 아버지가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시계도 없고 TV도 없던 그 시절, 상고머리 한번 깎아보는 것이 소원이었고, 운동화는커녕 검정 고무신 대신 그림 그려진 흰 고무신 한번 신어보는 것이 소원이었고, 소풍날마다 용돈 50원으로 박하사탕으로 만족하며 운동장 한 귀퉁이에서 눈물을 닦고 울지 않은 척하느라 애쓰던 내 모습도 소중한 추억의 한 장면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시골 깡촌에서 상처가 나면 흙을 바르고 한겨울 마당에서 세수하고 들어가다 문고리에 손이 쩍쩍 붙던 추억은 없겠지요.


고단했던 시골생활

씀바귀와 달래, 다래와 머루, 통일벼와 아끼바라, 콩새와 꾀꼬리, 소금쟁이와 고추잠자리, 두더지와 지렁이, 오리봉나무와 상수리나무, 수랑골과 구래들, 덴나이까 아저씨와 악보소리꾼아저씨, 칼 가는 숫돌과 도리깨, 무명밭과 차수수밭에 대한 추억도 없겠지요. 풋풋한 땅을 밟으며 넉넉히 안아주는 들이 있어 고단하지만 풍요롭던 그 시절 고향살이가 그립습니다.

 

그렇지만, 이럴 때 눈물이 납니다. 초등학교 5학년, 5월5일 운동장에서 왁자지껄하게 축구하는 성일이, 희탁이와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그 신나는 팽매싸움도 함께 하지 못하고 지게를 지고 푸세식 화장실의 왕겨에 묻어있는 똥냄새 나는 거름을 한바작 짊어지고 뒷밭을 오를 때 시골의 고달픈 운명이 서러워서 눈물이 납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복숭아처럼 뽀얀 얼굴을 한 예배당 전도사 댁 딸아이가 우리 반으로 전학을 왔습니다. 마침 그날, 전달에 본 월례고사 시험성적을 발표했는데 내가 1등을 했습니다. 그 아이는 확실히 나를 주목했습니다. 우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그 친구는 예배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콩줄기를 잔뜩 지게에 짊어지고 기울어가는 지게를 넘어뜨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때꼬장물 흐르는 내 얼굴을 보았습니다.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고 이미 자존심이 구겨진 자국 위로 주르륵 눈물이 번지고 있었습니다. 중학교 때까지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이 너무 싫었습니다. 가끔 부모님을 원망했습니다.

 

노부부가 마을회관에 다시 다다르니 요즘 벼 매입가격을 놓고 고향 분들의 한숨소리가 높습니다. 작황은 떨어지고 생활비는 올랐는데도 정부의 벼매입 목표가격은 거꾸로 내려가니 가슴 답답한 처지입니다.

 

농업의 공익적 기능을 감안하면 세계무역기구(WTO)의 규정에 위배되지 않는 수준에서 농업생계 보전형제도 도입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결국 쌀값의 문제는 농업 값이요, 농민 값이기 때문에 범국가적으로 소득을 보전해줘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농업의 기본적 뿌리입니다. 쌀소득의 안정적 보장은 물론 농촌의 안정적 소득보전은 고향사람들을 고향에서 살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지원이자, 농촌에 살고 있는 고향 분들의 희망인 것입니다.<계속>   /영암신문 명예기자단 자문위원=서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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