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복전·도포면 목우동 출생·법무부 연구관·대구소년분류심사원 원장·청주미평고등학교 교장·경기대 겸임교수 역임·현)학교폭력대책 자치위원·현)수필작가 등으로 활동
얼마 전, KBS 1TV가 진행하는 아침마당에서 외국에서 시집온 며느리를 둔 시골 시어머니들의 며느리 자랑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며느리들은 중국 조선족을 비롯해 일본, 베트남, 캄보디아, 티베트 출신 등 아주 다양하고 언어와 피부색깔도 각기 다르다. 그래도 한국인 남자를 만나 아들 딸 낳고 우리말, 우리풍습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내가 보기에도 대견스러웠다. 그러니 시어머니가 기쁘지 않겠는가? 이제 우리나라에는 외국에서 시집온 며느리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영어 원어민 강사를 비롯해 각 분야 전문직종과 소위 3D업종 등 여러 업에 종사하는 외국인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필리핀, 인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등 여러 나라 출신이다. 이제 우리는 외국인 백만 명과 함께 살고 있다. 우리 인구의 2.2%에 해당된다. 이러다 보니 흑인이나 갈색인종, 곱슬머리나 노랑머리 외국인을 보아도 상당히 편견이 해소된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편견이 해소 되어가는 것이 얼마나 되었을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국인과 국제결혼을 하면 이상한 눈초리로 보았다.

우리는 단군이 이 나라를 개국한 이래 단일민족, 백의민족임을 긍지로 삼아 왔고, 외국인 백만인 시대인 현재에도 단일민족의 혈통이 무너진다고 개탄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극단적 민족주의는 국수주의나 배타주의 또는 아집에 빠지기 쉽다. 독일의 히틀러가 게르만 민족의 국수주의에 빠져 인륜적 범죄인 단종(거세)을 비롯해, 유태인학살을 자행했다. 우리는 특히 조선조 때 배타주의적이요, 아집에 빠져 일본사람은 왜놈, 청국사람은 때놈이라 폄하했고, 그 이외 국가는 인정하지 않았다. 우물안 개구리로 국제정세에 너무 무지했고, 배타주의 때문이었다.

효종때 하멜 일행이 청나라에서 일본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제주해안에 표류했을 때 우리 조정은 그들이 사람인가를 실험했다는 일화가 있는가 하면, 그들이 우리나라를 염탐하러 온 것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억류시켜 대부분은 죽었고, 하멜은 10여년 후에 탈출에 성공, 네델란드로 귀국하여 표류기를 쓴 것이 하멜표류기이다.

이처럼 우리나라가 철저하게 쇄국정책으로 일관하고 있을 때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양 세계는 어찌했던가? 영국은 13세기초 왕권에 도전하여 국민대헌장인 마그나카르타를 선언했고, 14~16세기에는 이태리의 피렌체를 시발점으로 인본주의를 근간으로 한 르네상스 꽃을 피웠다. 그 이후 루소, 존록크, 몽테스큐나 아담스미스와 같은 대사상가를 배출하여 국민주권과 자본주의사상의 토대를 굳건히 함으로서 18세기 말에는 불란서 대혁명을 성공시켰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왕권신수설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일구어 냈다.

이러한 사조는 유럽의 어느 한 국가에 국한하지 않고 유럽 전체를 풍미했다. 동시에 각국은 무역을 통하여 경제적 부를 축적해나갔다. 일부 국가들은 제국주의로 돌변하여 인접 국가를 괴롭혔고, 19~20세기에는 잠자고 있던 동양을 침공하였다. 우리나라도 그 파고에서 예외 일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 유럽은 세계1·2차 대전이후 숨을 고르고 있는 듯하다. 타국과의 무력전쟁에서 벗어나 유럽의 공동번영을 목표로 1994년에 유럽 27개국이 참여한 유럽연합(EU)을 결성하고, 유로화라는 단일화폐를 쓰며, 관세장벽을 허물고 국경은 있으되, 입국심사 없이 왕래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현상을 지난 10월 중순 오스트리아, 스위스, 독일, 이태리, 불란서 국경에서 확인하면서, 우리도 외국인 백만 명과 함께 사는 개방의 시대를 넘어 남북이 분단의 벽을 허물고 자유로 왕래할 수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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