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석태·군서면 월산마을 출생·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 졸업·MBC 뉴욕특파원·MBC 보도국 국제부장, 문화과학부장·MBC 보도국 부국장, 해설주간·MBC 논설위원(현)
10월도 이제 하순의 절반이 지나 가을이 깊어가면서 온 산하에 단풍의 향연이 절정이다. 만산홍엽(滿山紅葉)이라는 말 그대로 가을 산을 울긋불긋 화려하게 물들이는 단풍은 꽃보다 더 곱다. 빨갛고 노란 단풍이 맑은 계곡물이나 파란 가을 하늘 과 어울려 물들어있는 모습은 꽃이 따를 수 없는 조화다. 중국의 시성 두보는 ‘산행’이라는 시에서 “서리 맞은 단풍잎이 한창 때 봄꽃 보다 붉다”며 단풍의 아름다움을 예찬했고 청구영언의 가인 김천택은 “흰구름 푸른 내는 골골이 잠겼는데 추상(秋霜)에 물든 단풍 봄꽃 보다 좋아라”라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생물학적으로 단풍은 나무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한 자구책으로 잎에 대한 수분과 영양분의 공급을 차단해버린 뒤 잎 자체의 성분만으로 엽록소의 분해작용을 계속하면서 잎에 숨어있던 여러가지 색깔이 드러남에 따라 생긴다고 한다. 이러한 설명과는 아랑곳없이 단풍을 보면 나는 나뭇잎들이 한 해의 생을 마감하기에 앞서 스스로를 불태워 자신의 존재와 생을 찬양하는 화려한 향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리고 나를 비롯해 ‘인생의 가을’에 들어선 사람들도 저 단풍처럼 스스로의 존재와 생을 찬란하게 불태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그렇지만 인생의 가을에 들어선 대부분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돌아보면 그와는 너무나 다른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40대 후반에서 50대에 해당될 이런 사람들은 대다수가 단풍처럼 찬란하게 자신의 존재를 불태워 보지도 못한 채 낙엽처럼 표류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인 것처럼 보인다. 인생의 가을이 되도록 살아온 만큼 그동안 배우고 터득한 지혜와 경험으로 사람과 삶, 세상에 대해 그만큼 원숙하면서도 자신 있고 여유로워야 할텐데 오히려 현실은 그 반대이니 슬픈 일이다.

기업의 구조조정이 상시화하면서 40대에 벌써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이 크게 늘고 있고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도 늘상 자신의 자리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사람에 대한 평가가 돈과 지위 위주로만 이뤄지다보니 웬만큼 성공하지 않고는 가정에서 조차 기를 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 놈의 세계화다 뭐다 하면서 세상이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빠르게 변해 가다보니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고 무언가 자신만 뒤처지는 것만 같다. 때문에 알 수 없는 강박증에 쫒기는 사람들도 많다. 또 세상이 갈수록 젊은 사람 위주로만 돌아가고 자신들은 그들에 내몰려 설자리를 잃어가는 것 같아 못마땅하기만 하다.

거칠게 살펴본 인생의 가을 세대의 이러한 위기와 불만은 우리 사회의 변화속도가 너무 빠르고 역동적인데다 그에 따라 젊은 세대가 급속도로 치고 올라오는 데 기인하는 면이 많을 것이다. 그러한 변화는 누구도 막을 수 없겠지만 우리 사회가 속도와 변화만 좇다보니 이미 한참 나타나고 있지만 못지않게 중요한 균형과 깊이, 여유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큰 문제다. 세계에서 고령화가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평균수명은 늘어나는 우리 현실에서 중년실업이 늘어나고 4,50대의 경험과 능력을 사장시키려 든다는 건 나라 발전을 위해서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386이 득세한 현 정권 들어서 부쩍 심해진 측면이 있으며 세대간 갈등도 훨씬 더 심해진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늘의 현실은 어쩌면 인생의 가을 세대가 세대간 싸움에서 젊은 세대에게 밀려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2,30대와 50대 이상의 표가 크게 갈린 지난 2002년 대선은 세대간 표 대결이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벌어진 선거로 평가된다. 노무현 후보의 당선은 2,30대의 승리의 결과이기도 했다. 범여권의 지리멸렬로 정치상황과 선거판이 크게 달라진 올 12월 대선에서는 2002년과 같은 세대간 표 대결이 다시 재연될 것인지, 또 인생의 가을 세대의 표심은 누구에게로 향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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