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석 태


▲ 박석태·군서면 월산마을 출생·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 졸업·MBC 뉴욕특파원·MBC 보도국 국제부장, 문화과학부장·MBC 보도국 부국장, 해설주간·MBC 논설위원(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여름 피서라는 건 나에게 먼 남의 얘기였다.

부모님이 농사를 짓는 집치고 바쁜 여름철에 단 며칠이라도 피서를 간다는 건 엄두를 낼 수 없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사정이 그렇기도 했지만, 우리 동네는 시골치고는 굳이 다른 곳에 가지 않고도 그런대로 피서를 하기에 썩 좋은 곳이기도 했다. 파도치는 해변과 백사장, 물 많은 강이나 깊은 계곡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동네 양옆을 흐르는 냇물이나 뒷산 아래 방죽과 폭포는 더위를 식히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피서에 가장 좋은 곳은 뭐니 해도 마을 뒷산의 폭포였다. 마을에서 15분여 거리에 위치한‘초수동폭포’라는 이름의 이 폭포는 높이는 2미터가 채 되지 못했지만 수량이 제법 많아 물맞이에 아주 좋았다. 무엇보다 물이 얼음처럼 차가워 몇 분만 계속 맞고 있으면 더위는 싹 날아가고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복날이면 아버님이 동네 다른 어른들과 함께 이 폭포에서 음식을 차려놓고 물맞이에 술을 드시며 모처럼 망중한을 즐기시던 일이 기억난다.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 여름방학 때면 나도 매일 오후 소에게 꼴을 먹이러 가기 전 이 폭포에서 물맞이를 한 뒤 바위에 앉아 사색에 잠기곤 했다.

그 다음 피서에 좋은 곳은 동네 뒤 산자락의 방죽이었다. 직경 50미터 안팎의 그 방죽은 어느 정도 들어가면 갑자기 어른 키가 넘을 정도로 깊어져 아이들에게는 위험한 곳이었다. 그렇지만 물이 그다지 더럽지 않아 물에 뜰 줄만 안다면 더 없이 좋은 야외 수영장이었다. 초등학생을 거쳐 중학생 때까지 나는 그곳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수영과 잠수실력을 겨루거나 물싸움을 하며 여름오후를 보내곤 했다.

그러나 피서하기에 가장 쉽고 가까운 곳은 역시 냇가였다. 동네 양옆을 흐르는 냇물은 수량이 많고 접근이 쉬운 곳에 빨래터가 만들어져 있어 남자들은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기 전 그곳에서 땀으로 찌든 몸을 씻었으며, 여자들은 저녁을 차려먹은 뒤 캄캄한 밤에 서너명씩 냇가를 찾아 몸을 씻곤 했다. 특히 동네 양옆을 흘러온 냇물이 만나는 동네 앞 냇가는 폭이 비교적 넓고 깊은데다 물이 맑아 초등학교 1·2학년짜리 까지 아이들에게는 가장 좋은 물놀이 장소였다. 우리들은 여름내 그곳에서 멱을 감거나 물싸움을 하기도 하고 물가 모래에서 모래장난에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이제 먼 옛날 일일 뿐으로 오늘의 고향은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동네 양옆의 냇가는 사방공사로 폭이 더 넓어졌지만 어디라도 온통 키 큰 잡초들로 뒤덮여 내라고 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뿐만 아니라 냇가 곳곳에는 농약병과 생활쓰레기가 쌓여있어 쓰레기하치장이 돼가고 있다. 집집마다 상수도시설이 돼있다 보니 더 이상 내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뒷산 밑 방죽은 한 때 부근 숲이 소 방목장이 되면서 없어진지 오래고 폭포로 가는 길도 자취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묵어버렸다.

폭포도 ‘물구멍’이라 불리던 수원지(水原地)가 동네 상수원이 되면서 물이 말라버렸다.

이러한 현상은 시골사람들이 상수도와 TV, 냉장고, 선풍기, 에어컨에 자동차 등 생활의 편의를 추구하면서 생활 반경이 자연으로부터 점차 멀어진데 있을 것이다. 물론 시골은 그 자체로서 자연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현상은 시골사람들의 자연과의 공존 영역이 점차 축소되고 도시 사람들처럼 자연으로부터 스스로 소외돼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해 안타깝기만 하다. 무엇보다 그로인해 주변 자연이 보호관리 소홀로 흉해지고 공동체와 인심도 좋지 않게 변해가는 것만 같아 걱정스럽다.

이 여름 얼음처럼 차고 그냥 먹어도 좋을 정도로 맑은 초수동 폭포에서의 물맞이가 무척이나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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