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석태·군서면 월산마을 출생·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 졸업·MBC 뉴욕특파원·MBC 보도국 국제부장, 문화과학부장·MBC 보도국 부국장, 해설주간·MBC 논설위원(현)
초등학교 시절 매년 새 학년이 되면 학교에서 ‘가정환경조사’라는 걸 실시했습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가재도구에서부터 자전거와 라디오, 축음기 등 문명의 이기라 할 만한 물건의 소유 여부를 묻는 물음에 답하게 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통해 학생들 가정의 생활수준을 알아보려 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런데 그 물음 가운데는 부모의 학력을 묻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당시 시골의 대부분 어른들이 그랬지만, 나의 아버님·어머님의 학력은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해 겨우 한글을 쓰실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두 분의 학력을 항상 초등학교 졸업으로 기록하곤 했습니다.

선생님께 거짓말 하는 것이 무척이나 꺼림직했지만, 부모님이 무식하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그만큼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여겨졌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요즘 우리사회에 끊임없이 확산되고 있는 교수·학원강사·연극배우·연예인·스님 등 유명 문화예술인들의 학력위조 파문을 보면서 문득 내 어린 시절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일찍이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나이에 부모님의 학력을 위조한 셈이니, 우리사회의 학력 콤플렉스가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지를 말해주는 좋은 사례라 할 만 합니다.

문화예술 분야는 재능이 전제돼야 해 상대적으로 학력의 중요성이 덜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로 이 분야에서 학력위조 사실이 속속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은 그 만큼 대중에 많이 노출됐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면 그렇지 않은 일반인들의 경우는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요즘 학원가에서는 유명 강사들이 공개된 이력을 고치거나 숨기고 있고 포털과 언론사 인물 데이터베이스에는 학력 수정을 요청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일반 회사에서는 특정인의 음해를 위한 허위학력 위조 제보도 잇따르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다가 학력위조 파문으로 우리사회에 중세의 마녀사냥이 재연되는 게 아닌가 우려될 정돕니다.

우리사회가 취직과 승진, 결혼 등 출세와 사회적 성공이 출신 고등학교와 대학에 좌우되는 뿌리 깊은 학벌주의 사회인 것은 아무도 부인 못할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한 참 뛰어놀기에 바빠야 할 초등학교 때부터 사교육과 입시지옥에 시달려야 하는 것도 바로 이 학벌주의가 원흉입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모르게 난마처럼 얽혀버린 교육문제의 뿌리도 학벌지상 주의입니다.

그 학벌주의가 만든 오늘날, 우리교육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오로지 입시위주의 삭막한 기계적 맞춤식 교육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정신과 육체의 조화로운 발달을 통한 성숙한 인간을 양성하는 교육 본연의 목적 운운하는 건 세상물정 모르는‘시대착오’적 생각일 뿐입니다.

그 결과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서울대의 국제경쟁력이 세계 100위권 이라는 참담한 현실입니다. 일반 회사간부들에 따르면 대졸 신입사원 대부분이 조그만 일에 대해서도 문제해결 능력이 없어 처음부터 새로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합니다. 사정이 이럴진대, 국제화 시대에 국내에서 조금 좋은 학교 나왔다고 자랑할 일이 결코 아닙니다.

걱정되는 것은 이번 일로 우리 사회의 학벌주의가 더 심해지는 건 아닐까 하는 겁니다. 학력 위조 당사자들을 비난하고 그들에게 사태의 책임을 떠넘기면서 어떻게든 좋은 학교를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다 많아지지 않을까 하는 우렵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사회가 성숙했다면 이번 파문을 계기로 개방과 다양성의 시대에 역행하는 ‘끼리끼리’의 폐쇄적 인재기용과 운영, 획일화 되고 틀에 박힌 인간 양성 등 학벌주의의 폐해를 성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 같이 실질보다 겉껍데기를 중시하는 학벌주의와 허위의식의 타파책을 모색할 수 있기를 나는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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