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우스님·대한불교 조계종 중앙종회의원(현)·중앙승가대학교 총무처장(현)·정신대위안부 나눔의 집 이사(현)·김포불교대학 학장(현)·도갑사 주지(현)
부처님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 극단적인 두 가지 길이 있으니, 하나는 관능(官能)이 이끄는 대로 욕망의 쾌락에 빠지는 일이고, 또 하나는 고행으로 자기 자신을 의식적으로 괴롭히는 일이라고 했다.

쾌락에 빠지는 것은 비열하고 어리석어 무익하며, 고행은 괴로울 뿐 이익이 없으므로 출가 수행자는 그 어느 쪽에도 치우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도(中道)의 가르침이다.

중도란 ‘중간 길’ 또는 좌우에 치우치지 않는 ‘한 가운데’라는 중용(中傭)이 아니다. 실제 인간생활에 적용되는 도리로 공리공론(空理空論)이 아닌 정도(正道)를 말하는 것이다.

좌·우, 중간을 말할 때의 중간은 좌·우에 대한 위치적인 처지를 말하지만 중도의 중(中)은 그런 고정적인 위치에서 벗어난 좀더 자유로운 자연선을 뜻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되 선입견이나 편견 등의 걸림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루고 난 후 다섯 비구들에게 “나는 쾌락도 고행도 무익하고 하등한 것이어서 다 버렸으니, 두 극단을 버림으로써 중도를 깨닫게 되었고, 중도를 깨달음으로써 인간세상의 일들을 바르게 통찰하고 바르게 인식하는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의 법, 무상, 무아 등은 중도의 눈으로 관찰한 결과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연기성(緣起性)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自他不二) 점을 전제로 한 무조건적, 포괄적인 사랑인 자비정신의 특산은 민주주의 정착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또 나 혼자만 깨달음과 극락정토에 다시 태어날 것을 염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모든 중생의 구제를 추구하는 대승정신 또한 민주주의 정신과 다르지 않다.

현대사회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인간 상실의 시대라는 점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는 인간상실의 시대에 인간중심의 종교인 불교는 인간을 인간본연의 자리로 되돌려 보내 줄 것이다.

또 우리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남북·지역·계층·성별·세대·종교 간의 갈등과 대립은 불교의 원융회통의 정신과 방편의 묘를 살리면 통합과 화합으로 이끌 수 있다.

불교가 계속 산중에만 머무르면서 사회에 등을 팔리고 있어서는 안 된다.
불교의 기본 교리는 고통 속의 중생을 구원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개혁불사를 통해 시대의 변화와 요구를 과감하게 받아들여 중생의 삶의 질을 높이고 중생구원을 위한 민주정치를 이 땅에 꽃피우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불교의 동체대비사상이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요리함과 같아야 한다고 노자는 말했다. 작은 생선을 이리저리 뒤집고 칼질을 해대면 생선은 상한다. 불 세기를 적절히 조정하고 간단하게 조미하는 데 그쳐야 작은 생선을 요리할 수 있다.

노자의 이 말은 사실 무위(無爲)의 묘체를 강조하기 위한 일종의 치국론(治國論)이다.

한국이 생선이라면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간 상태일 듯싶다. 이념논쟁에, 과거사 분란에 정신 차릴 겨를이 없었다.

축성(築城)은 고사하고 황성 옛터처럼 허물어져 나가기 일보 직전일 테다.
오늘의 현실은 관념과 지식은 충만해 보이지만 동체대비사상으로 서로를 조율하고 아우르는 지혜가 보이질 않아 걱정이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정법시대를 준비하는 슬기로운 무리들이 일어나 원융회통하면서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노력들은 분명 올 것이다. 그것이 중도통합사상이다.

중도정치는 사상과 철학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인간(소우주)과 세상(대우주)은 본래 불이(不二)사상이 근본인 것을 일찍 깨닫는 자가 새로운 패러다임의 정치와 새로운 인간사를 이끌고 갈 선구자임이 틀림없다. 단, 시기적 오차가 다소 있을 뿐임을 명심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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