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우스님·대한불교 조계종 중앙종회의원(현)·중앙승가대학교 총무처장(현)·정신대위안부 나눔의 집 이사(현)·김포불교대학 학장(현)·도갑사 주지(현)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웰빙’ 뿐만 아니라 편안히 잘 죽는 법인 ‘웰다잉’에도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웰다잉’이란 인생의 마무리를 밝고 아름다우며 품위 있게 한다는 의미다. 통계청이 지난 3월 조사한 100세 이상 961명중 796명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들의 가장 큰 바램은 편안히 빨리 죽는 것(23.8%) 자손 잘 되기(21.8%)와 건강회복(16.8%)이라고 밝히고 있다. 생과사의 갈림길에서면 어떤 식으로든 삶을 연명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웰다잉’은 단지 고통을 줄이느냐 존엄성을 지키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종교적 이해가 포함되어 있다. 사후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좀더 가치 있게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해주는 ‘웰다잉’ 눈높이 교육이 필요하다. 이러한 교육을 통해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 아름다운 노년을 만들어가는 준비과정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우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교에서는 아침저녁으로 반야심경을 통해 ‘웰다잉’을 아름다운 화음으로 노래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체험을 했는지는 미지수다.

잘 먹고 잘사는 웰빙(well being)문화가 이제는 삶의 가치를 추구하고 인간내면을 풍요롭게 하기위한 정신적 투자인 ‘웰다잉’ 문화로 새롭게 진화되고 있다.

우리나라 대학교수들이 올해를 표현하는 고사성어로 ‘당동벌이’(黨同伐異)로 뽑았다. 이 말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붕당을 만들어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배척·공격 한다”는 의미다. 연초부터 지금까지 정치권이 정파적 입장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대립각을 세운 것이 선정의 배경이다.

올해가 다른 어느 해보다 국민의 삶이 어려웠다고 한다. 이 모든 어려움이 ‘당동벌이’하는 정치권에 그 원인이 있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그런데 ‘당동벌이’는 정치권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각 분야, 세대, 지역 간에도 나타나고 있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영혼을 가진 인간에게 죽음은 이승 삶의 끝일 뿐 아니라 저승 삶의 시작이다. 장례는 저승으로 가는 삶에 대한 전별식이고, 무덤은 저승으로 가는 문이다. 장례와 무덤 양식을 결정하는 것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의 의식이다. 그래서 산 자의 사생관(死生觀)만큼이나 장례 풍습도 다양하다.

가장 흔한 것이 땅에 묻는 토장(土葬)이지만 문무왕의 수중릉처럼 수장(水葬)도 있고, 화장(火葬)도 흔하다. 특이한 장례풍습도 많은데 시체를 한데 두어 비바람에 풍화시키는 풍장(風葬), 새들의 먹이로 만드는 조장(鳥葬) 천장(天葬), 친지들이 시신을 나눠 먹는 인복장(人腹葬) 등은 유체(遺體)와 명당(明堂)을 중히 여기는 우리의 관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장례풍습들이다.

장례풍습은 이처럼 다양하지만 크게 봐서 산 자의 사생관은 둘이다. 한 유형은 진시황이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진시황은 제나라 사람 서시(徐市)·서복(徐福)이라고도 한다’등의 상서(上書)에 따라 바다 가운데 신선(神仙)을 찾으러 수천 명의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보냈다. 원래의 목적은 불로초(不老草)를 찾기 위한 것인데 우리나라까지 왔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는 현세의 권력으로 불사(不死)하려는 몸부림이다. 무위(無爲)의 철학인 노장(老莊)에서 이런 불로장생(不老長生) 관념이 가장 유행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와 다른 유형은 공자이다. ‘논어’(論語) ‘이인’(里仁)편에 나오는 “아침에 도를 듣고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는 것이다. 가장 현실적인 유학이 가장 현실 초월적인 사생관을 갖고 있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다.

최근 웰빙에 이어 웰다잉이 자주 거론된다. 불교 수행체험을 통해 가능한 저승문화를 세대에 관계없이 도전해서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것을 체험해보는 것이 참된 저승문화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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