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복전·도포면 목우동 출생·법무부 연구관·대구소년분류심사원 원장·청주미평고등학교 교장·경기대 겸임교수 역임·현)학교폭력대책 자치위원·현)수필작가 등으로 활동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지 1천600여년이 되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는 국가적 종교로서 역할을 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억불숭유 정책에도 불구하고 우리생활 속에 깊이 자리하면서 우리민족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해왔다. 국가가 위난에 처해 있을 때에는 호국불교로서의 역할도 했다. 미래에도 그럴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기에 우리 영암인들은 도갑사에 대하여 애정을 가지고 예의주시하고 있다. 도갑사가 우리 군민에게 문화재적인 상징성을 넘어 보다 큰 역할을 해주기를 우리 군민들은 이심전심으로 바라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수년전 대웅전이 화마를 당하였을 때에는 군민 모두가 가슴 아파하면서 쌀 한 되씩이라도 정성을 모아 대웅전 복원불사에 동참하였다. 중흥기의 도갑사 규모를 입증하는 증표는 1629년부터 4년에 걸쳐 조각한 수미왕사비, 1682년 조성한 물을 받아쓰는 석조들이 이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도갑사 부처님 한 분이 보다 넓은 세상으로 가서 중생을 제도하라는 명을 받으신 모양이다. 우리나라 조계종 총본산인 서울 종로에 있는 조계사 대웅전 본존부처님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그때가 1938년 조계사 낙성 때다. 이 시기는 일제 강점기로 일제가 조선불교를 자기네들이 통치하는데 용이한 체제로 만들었다. 조선시대 종파를 없애고, 무종산승시대를 만들었다. 이를 타파하여 우리종교를 살려야 한다는 총본산 설립운동이 일제 말기에 전개 되면서 조계사 건축을 시작하였다. 대웅전은 전라북도 정읍 보천교 십일전(十一殿)을 옮겨 1938년 11월 이축을 완료하고, 도갑사 부처님(이하 “우리부처님”이라한다)을 대웅전 본존불로 모신 것이다. 어언 70년이 되었다.

조계종이라는 종명은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일본총독부가 주도하는 본산지주회의에서 조선불교 선교 양종이라는 종명대신에 조선불교 조계종이라는 종명을 택한 것은 일본불교와의 차별화를 염두에 둔 것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이제는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등 삼보사찰을 비롯한 한국전통사찰의 80%가 조계종에 속한다. 물론 도갑사도 조계종에 속한다. 이런 관점에서 조계종 총본산이 있는 조계사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고, 이 사찰의 대웅전 본존불은 우리나라 전통사찰의 으뜸가는 부처님이라는 논리는 비약이 아닐 것이다. 이 부처님이 바로 우리 부처님이셨다.

우리 부처님은 서울로 자리를 옮기신 후 해방을 맞이하고, 6·25 동란과 신군부의 법란을 거치면서도 어김없이 법어를 토하면서 중생을 제도해왔다. 이 불상이 조성된 것은 탄소 측정결과 연산군 때라고 하니 500년이 되었다는 결론이다. 그래서 서울시문화재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함부로 방치하거나 훼손할 수 없다는 것이 종무소 관계자의 말이다.

그런데 2006년 여름부터 우리 부처님이 안보여 금년 2월 필자는 조계사를 다시 찾았다. 그랬더니 대웅전에 다른 삼존불과 나란히 자리는 같이 하고 있으나 본존불의 위치에서 밀려나 아쉬움이 많았다.

대웅전의 규모에 비하여 우리 부처님이 너무 작아서 취한 조치라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우리 부처님이 보이지 않은 동안 목조 석가모니 부처님 보수 및 개금의 마지막 공정인 부처님의 마지막 옻칠과 개금 및 개안불사가 마무리되어 금년 2월초에 대웅전에서 부처님 점안식을 행하고 삼존불과 나란히 모셨다. 앞으로 조계사 보수 및 복원불사가 완료되면 영산전에 본존불로 모실 것이란다.

객지에서는 고향의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는데 서울에서도 종로 한복판에 있는 조계사 대웅전 본존불이 도갑사 부처님이었다는 것은 광화문에 우뚝 서 있는 교보빌딩에 이어 또 하나의 영암인의 자긍심이라 하겠다.

부처님! 우리부처님! 금년 초파일을 맞아 서울에서 설법 그만 하시고 본향인 도갑사로 돌아오지 않으시렵니까? 그리하여 영암인 들에게 부처님의 법문을 내려 주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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