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우스님·대한불교 조계종 중앙종회의원(현)·중앙승가대학교 총무처장(현)·정신대위안부 나눔의 집 이사(현)·김포불교대학 학장(현)·도갑사 주지(현)

한해 벽두에 덕담을 주고받는 인사는 아름다운 미풍양속이다.

비록 인사치레일지라도 부드러운 그 말이 지친 가슴을 달래주고 삶의 희망을 낳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는 세파에 찌든 얼굴과 거친 언행에 지쳐있다. 현실의 어려움과 희망의 부재는 고통체감지수를 배가시킨다.

이제 봄의 기지개와 함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소용돌이의 정치’는 12월의 대통령선거가 가까워질수록 광폭해질 것이다. 그 여파가 경제와 외교, 나아가 나라의 안보에 마저 미칠 것이다. 진영(陣營)논리와 편가르기도 더욱 기승을 부려 여당의원들의 탈당과 교섭단체가 구성되고, 정치의 계절과 함께 한반도를 둘러싼 불확실성에 편승하려는 온갖 책략이 전략이라는 미명아래 난무할 것으로 전망된다. 갈등과 대립, 그리고 차이를 자양분으로 삼는 것이 민주주의이므로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갈등과 대립을 합리적으로 풀고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데 우리 사회는 그리 익숙하지 않다. 이는 일천한 한국 민주주의에 상당한 시간과 인내를 요구하는 과제며, 사회적 학습을 통해서만 점진적으로 개선될 수 있는 문제다. 더 큰 난제는 통합과 다양성을 외치는 아름다운 담론 자체가 권력의지와 위선을 감추고 있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통합을 소리 높여 외치면서 오히려 갈등을 재촉하고, 화해를 주문하면서 분열을 잉태하는 숱한 말들을 보라. 그 결과 언어와 실천 사이의 간극이 갈수록 확대된다. 담론은 공허해지며 말은 진정성을 잃게 된다. 언어의 성찬(盛饌)이 초라한 현실을 배반하게 되는 것이다.

말보다 행동이 중요하다는 평명(平明)한 교훈을 새삼 상기할 필요도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위선적이고 자기배반적인 담화의 만연이 민주주의의 기초를 위협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고질병 가운데 하나는 어떤 영역에서든 ‘자기가 하는 일만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이들과 자기 말만 일방적으로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데 있다. 자기 확신은 소중한 것이지만 균형감각을 잃을 때 재앙이 되기 쉽다. 마찬가지로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독선은 사회적 공해이자 민주주의의 적이 되기 십상이다. 부단한 상호 비판과 소통 앞에 열려 있는 말만이 진정한 담론일 수 있는 것이다.

소통의 언어와 실천에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확신하면서도 다른 이들의 일도 내 일만큼 중요할 수 있다는 자각을 실행하는 것이다. 또한 정확하고 투명한 말을 가능하면 부드럽게 하면서 남의 말을 듣는 훈련이 필요하다.

한자의 성인성(聖)자는 귀이(耳)자와 입구(口)자와 임금왕(王)자가 합성된 글자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듣고 난 후에 자기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임금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해한다(understand)는 아래(under) 서있다(stand)는 말처럼 상대방의 발아래라는 의미다. 남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결국 말과 실천에서의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성숙함의 요체인 것이다. 자신만이 가장 중요하고 자기 말만 들어 달라고 떼쓰는 것이 어린아이들의 특징이 아닌가.

그러나 정작 ‘입장 바꿔 생각하고 말하기’ 보다 어려운 것도 드물다. 오래된 삶의 지혜와 현대 민주주의의 원리가 이 지점에서 서로 만나는 것도 의미심장한 일이다. 나아가 역지사지가 무원칙한 기회주의와 절충주의로 타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무게중심을 잡는 일이 긴요하다. 균형 잡힌 자존(自尊)의식은 열린 마음으로부터 창출된다. 열렸으되 중심을 잡은 마음은 쉬이 흔들리지 않으며 소통하는 말의 주체다.

정녕 항심(恒心)은 항산심(恒産心)으로부터 나오므로 절박한 민생고가 완화된다는 전제 아래 마음의 중심을 견고히 할 필요가 있다. 소통의 말과 차분한 마음의 중심, 그것은 한해의 험난한 파고(波高)를 헤쳐 갈 소중한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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