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석태·군서면 월산마을 출생·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 졸업·MBC 뉴욕특파원·MBC 보도국 국제부장, 문화과학부장·MBC 보도국 부국장, 해설주간·MBC 논설위원(현)
‘고향을 떠나온 지 몇 해이던가’

돌이켜 생각하니 내가 대입 재수를 위해 이불 보따리 싸들고 서울로 올라온 게 지난 1972년 5월이니 어언 35년의 세월이 지난 모양이다. 강산이 세 번도 더 변하는 세월이니 참으로 긴 시간이 흘렀구나.

그토록 오랜 세월을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50대 중반의 나이가 되도록 살았으니 이제 고향이며 유년시절의 일들이 잊혀질 만도 한데 오히려 더 또렷해지니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특히 너도나도 고향을 찾아가는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 때면 굳이 고향갈 일이 없어져 서울에서 명절을 쇠야 하는 나로선 그 간절함이 더하기 마련이다.

얼마 전, 설 때도 집사람과 둘이서 대강 차례상을 차린 뒤 아이들에게 억지로 절을 시켜가며 단 네 식구만 달랑 차례를 지내노라니 그 썰렁함과 적적함을 어쩔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 이른 새벽부터 손발이 꽁꽁 얼도록 이웃동네까지 세배를 다니고 작은 할아버지에서부터 삼촌과 숙모, 사촌형제들까지 넓은 집안이 비좁도록 다같이 모여 차례를 지낸 뒤 떡국을 먹던 고향에서의 설을 생각하면 이건 정말 명절이라고 하기가 민망할 정도다.

나처럼 유년시절을 보낸 시골 고향을 떠나 도회지 객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고향에 대한 생각과 느낌이 대개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도대체 고향은 우리에게 무엇이기에 그토록 먼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우리를 사로잡는 걸까? 연어와 비둘기, 바다거북이 같은 회귀성동물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나의 경우를 보면 고향은 유전자와 함께 한 인간의 정체성에서 중요한 요소인 정서의 DNA를 결정하는 원형질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시 말해 정체성의 큰 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전자가 그 사람을 결정짓는 선천적 요소라 한다면 고향은 산과 들 같은 단순한 공간으로서 뿐 아니라 함께 살았던 사람들과, 그들과 사이에 있었던 이런저런 일과 추억 등 시간적 요소까지를 포괄하는 후천적 환경이라 할 수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나는 고향이 영암, 그 가운데서도 월산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바위가 많아 아버지처럼 주름 많은 뒷산에서부터 산자락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과 내가 뛰어놀았던 숲과 들, 시내, 나무, 풀, 곡식 등 나를 키워주고 나와 함께 자라던 고향의 자연에 나는 감사한다. 그와 함께 순박하고 정 많고 일 밖에 모르시던 나의 부모님과 친척들,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들께도 나는 감사한다.

이름난 명승지는 아니지만 어린시절 그러한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얻은 느낌과 감동이 지금의 나의 감성과 마음의 결에 녹아있음을 나는 느낀다. 내세울 것 별로 없는 내가 감성이 그다지 둔하지 않고 열린 마음과 여유를 잃지 않으려 하는 것은 고향 덕이 클 것이다. 또 내가 조금은 정이 있고 순박하며 성실하려 하는 것은 나의 부모님과 고향 어른들의 영향 탓이 크리라 생각된다. 내가 만일 영암이 아닌 다른 도회지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나는 분명 상당히 다른 사람이 돼있을 것이다.

아련한 그리움으로 살아있는 마음 속 고향과 달리 오늘 현실의 고향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기계화된 영농에 교통과 주택, 가재도구 등에서 생활은 예전과 비교가 안되게 좋아진 것이 분명하지만 극심한 고령화로 젊은 사람과 애들을 구경하기가 쉽지 않으니 어쩌다 가보는 고향마을은 활기를 잃은 채 쇠락의 기색이 역력하다. 이러다가는 머지않아 나이 드신 노인 분들이 돌아가시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체결로 우리 농촌의 모습이 급변하게 되면 현실 속 고향을 영영 잃어버리게 되는 건 아닌지 정말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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