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복전·도포면 목우동 출생·법무부 연구관·대구소년분류심사원 원장·청주미평고등학교 교장·경기대 겸임교수 역임·현)학교폭력대책 자치위원·현)수필작가 등으로 활동
인간은 죽지 않고 영생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이런 욕망은 종교를 통해서 잘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은 지 49일이 지나면 생전에 지은 업에 따라서 사람이나 소, 개 등 여러 동물로 환생한다는 윤회사상을 통하여, 유교에서는 후손을 통하여 영생욕망을 충족하고자 한다. 유교에서는 후손이 그 집안의 대를 이어갈 아들을 출산한다는 것은 후손의 가장 큰 의무이행이다. 반대로 후손이 아들을 출산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가문이 문을 닫는 것으로 선조들에 대한 불효 중 가장 큰 불효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관념은 연령이 높아갈수록 아직도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런 관념에서 한 가문이 15대를 독자로 이어오다 16대에서 아들 형제를 두었다면 그것이 참말일까 하는 의문과 함께 그것은 기적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참말이요, 기적이며, 그 집안의 경사 중 경사이다. 이 기적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일본 규슈지방의 가고시마 현에서 사츠마야끼(薩摩燒)를 심수관(沈壽官)이란 이름으로 세습하여 운영해 오고 있는 도예가 집안이다. 이 집안은 일본에서 제일 오랜 도예전통과 세계적 우수자기를 만든다는 명성을 가지고 있다. 일본은 사츠마야끼를 한일문화 교류의 상징처럼 여기고 있다. 우리나라의 전·현직 대통령도 이곳을 방문했다.

심수관 집안의 원조는 심당길로 임진왜란 중인 1598년 일본이 우리나라 도공 43명을 끌어다 이곳에 강제 정착시켜 도자기를 만들게 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니까 심씨 일가가 이곳에 정착한지 400여년이 지났으니 한국이 고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다. 필자가 이곳을 방문한 것은 지난해 봄, 유인학 거석문화협회총재 등 고향의 지인들과 함께였다. 이때 14대 심수관옹은 “우리집안 가보1호를 보여주겠다. 이것을 알아 맞춰보라”고 하면서 누런 종이로 겹겹이 싼 조그만 두루마리를 손에 꼭 쥐고 울먹거렸다. 호기심과 기대에 차 있는 우리에게 심옹이 보여준 두루마리는 우리에겐 보잘 것 없는 머리에 쓰는 망건조각 일부였다. “이것은 우리 원조이신 초대 심당길 할아버지가 쓰셨던 망건으로 우리 집안이 이 망건을 쓰셨던 초대 할아버지의 고생을 생각하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뜻에서 이것을 가보1호로 정했다. 그래서 이 도요지에 화재나 변란 등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면 제일먼저 이 가보를 챙긴다”고 했다. 이 말을 하는 심옹의 울먹이는 감정이 우리 일행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이것은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동질감’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심수관가를 비롯한 이곳에 정착한 다른 도예 집안들도 명치유신 말엽까지는 고국의 풍속과 언어를 버리지 않고 한글도 가르쳐왔다. 그런데 다이쇼(大正)때부터 쇼와(昭和)시대로 들어서 일본의 침략정책이 강화되면서 다른 도예 집안들은 본적과 이름이 일본식으로 바뀌고 이곳을 떠났다. 그러나 심수관가는 성씨와 의상 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곳에 정착하고 있다. 지금은 대한민국 명예총영사까지 맡고 있다.

1970년대 초에는 13대가, 그 몇 년 후에는 14대가 조국인 대한민국을 찾았고 본관인 경북 청송까지 다녀갔다. 그들의 선조 중 심모둔(沈 屯)씨가 지금부터 200여 년 전인 텐매이(天明)시대에 그를 방문한 일본 모작가와 나눈 대화내용을 보면, 현대를 살아가면서 자기 뿌리를 소홀히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주는 것 같다.

자의든 타의든 고국을 떠나 외국에 거주하거나, 국내에서도 고향을 떠난 출향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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