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복전·도포면 목우동 출생·법무부 연구관·대구소년분류심사원 원장·청주미평고등학교 교장·경기대 겸임교수 역임·현)학교폭력대책 자치위원·현)수필작가 등으로 활동
낭산 선생님, 선생님은 영암인의 희망이요, 영암인의 기개의 표상이었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처음 인사드린 것은 1966년 초여름 동아일보사에서 제 아버님을 모셨을 때였고, 이후에는 호남학우회에서였습니다. 그런데 1971년 섣달 그믐날에 선생님이 타계하셨다는 비보였습니다. 7일 후 국민의 애도 속에 사회장으로 모시는 행렬과 함께 저도 장지에서 하관까지 선생님의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애도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월파 서민호 선생님도 선생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애통해하면서 지켜보셨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가신지 벌써 35년이 지났습니다. 많은 영암인들은 지금도 선생님을 잊지 못합니다. 아니, 이 나라 지성인이라면 선생님을 꼭 기억할 것입니다. 특히 영암인들이 선생님을 못 잊는 것은 단순하게 영암인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당신은 영암인의 희망이요, 영암인의 기개의 표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당시 이 나라의 7대 천재중의 한분으로 동경제국대학과 독일베를린대학에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수학하셨다는 화려한 학력은 암울했던 일제를 거치고 요동치는 해방 이후 정국에서 국가적 인물로서의 희망이요, 기대요, 영암인의 자랑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이러한 기대와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 일생이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영암인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폭압에 분연히 일어서고, 외적의 침략에 몸을 던지는 기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갑오농민전쟁에 적극 참여, 여성 의병1호 양방매 열사 탄생, 영보 형제봉소작쟁의 사건 등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해방 이후 정국에서 정치인은 돈이라면 검은 것 흰 것 가리지 않고 삼키는 풍조가 만연해 있었으나 선생님은 이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래서 만년에는 생활이 어려웠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 정치인은 권모술수에 능하여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한다는 속설이 있습니다만 선생님은 그런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선생님의 고고한 정신을 사위이신 김홍섭 대법원 판사가 이어왔습니다. 김홍섭 판사는 판사들의 귀감이 되어 후배판사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분입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일생을 통해 남기신 많은 업적들 중에 우리의 가슴을 후련케 하는 몇 가지 사례를 제 나름대로 간추려 보고자 합니다. 일제하에서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재직시 손기정 선수 가슴의 일장기 말살사건입니다. 일본인의 자부심을 뭉개버린 얼마나 통쾌하고 통쾌한 의거입니까. 또 ML당 사건입니다. 소련의 힘을 빌려 독립을 쟁취하고자 함이었는데, 당시 일본은 선생님께 사회주의 사상을 포기하는 전향서를 제출하면 서대문형무소에서 방면해주겠다고 회유했으나 이와 타협하지 않고 7년간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이때 한분밖에 없는 아드님이 병환으로 이승을 떠나셨습니다. 또 빼놓을 수 없는 사례는 해방 직전 조선총독부가 선생님에게 일본인의 인명과 재산을 보호해줄 것을 조건으로 치안유지권을 인수하라는 제안을 거부한 것입니다. 해방 이후에는 법무부장관 재직시 거창양민학살사건과 관련하여 그 막강한 힘을 가진 이승만 대통령께 “제 말을 중단하지 말고 끝까지 들어주십시오”하면서 신성모 국방장관을 중국 진나라의 조고에 빗대어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고사성어를 끝까지 직언하신 후 장관직을 사퇴했다는 일화는 두고두고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지금과 같이 정치·사회적으로 반목과 갈등, 가치관의 혼돈과 무소신이 난무한 시대에 선생님이 타계하신지 35주기를 맞아 선생님의 고결한 생애를 추모하면서 「낭산 김준연 선생기념사업」이 활성화되길 관계자들께 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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