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중 재 덕진면 노송리 송외마을生 전 광주시교육청 장학사 한국전쟁피해자유족 영암군회장

우리 집 앞마당에 봉선화가 활짝 피었다. 옛날 옛적에 백제 골에 착한 여인이 살았다. 어느 날 밤, 그녀의 꿈속에 아름다운 선녀(仙女)가 나타나 예쁜 봉황(鳳凰) 한 마리를 선물했다. 그 뒤 여인은 달덩이 같은 예쁜 딸을 낳아 봉선(鳳仙)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안타깝게도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아 누었다. 사경(死境)을 헤매고 있던 어느 날 임금이 동네 앞을 지나간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죽을힘을 다해 일어나 손끝에서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르고 구슬프게 연주를 했다. 그 연주 소리를 듣던 임금이 방으로 들어와 봉선이의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 불쌍해 백반 가루를 손톱에 발라 무명천으로 꽁꽁 동여매어 주었다. 그러나 그런 정성도 소용없이 끝내 봉선은 죽고 말았다.

그의 부모는 구슬피 울며 사람들이 많이 다니던 앞산 고갯길에 그녀를 묻어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무덤에서 빨간 꽃이 예쁘게 피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름 모를 그 꽃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꽃잎을 따서 손톱에 물을 들여 보았다. 신기하게도 손톱에 물이 빠지지 않고 너무나 고운 손톱이 된 것이다. 그 뒤로 매년 여름철이 되면 여인들이 손톱에 물을 들이고, 봉선이의 이름을 따서 그 꽃을 봉선화(鳳仙花)라고 부르게 되었다.(‘봉숭아’는 한글표기) 이런 슬픈 전설을 가진 봉선화는 봉선 낭자처럼 ‘순진한 소녀’ 또, ‘결백’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란 꽃말을 가지고 있다.

여름철에 들였던 봉선화 꽃물이 첫눈 내릴 때까지 손톱에서 빠지지 않는다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고려의 충선왕이 왕자일 때, 나라 형편이 어려워 몽골에 볼모로 끌려가게 되었다. 당시 함께 따라갔던 한 시녀는 어릴 때, 언니와 함께 다정히 봉선화 꽃물 들였던 추억을 되살려 손톱에 꽃물을 들이면서 고향을 잊지 않았다. 왕자도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사랑하는 조국을 생각했다. 언젠가 이 위기를 넘기면 고려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 것이다. 좌절하지 않고 용기를 얻어 유배 생활을 꿋꿋이 견뎌낼 수 있었다. 왕자가 무사히 고려로 돌아와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 시녀를 왕비로 삼고 궁녀들에게도 봉선화 꽃물을 들이게 했다고 한다.

손톱에 들인 봉선화물이 빠지지 않으면 수술할 때 손톱을 뽑아야 한다는 검증되지 않는 말도 있다. 수술하기 위해 마취를 할 때, 산소공급 말초혈관 순환상태를 손톱, 얼굴, 입술의 색깔 변화를 통해 확인한다고 한다. 저산소증이 나타날 때는 손톱과 발톱이 파랗게 변하기 때문에 수술하기 전에는 화장이나 매니큐어를 지워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산소포화도 측정기(Pulse Oximeter)가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없다니 마음껏 손톱이나 발톱에 봉선화 꽃물을 들여도 되지 않을까 한다.

내가 제주도로 연구학교 탐방을 갔을 때의 일이다. 연구보고대회가 끝나고 학교에서 제작하였다는 봉선화로 물들인 스카프 선물을 받았다. 귀한 선물이었다. 목에 두르니 색깔도 곱고 촉감이 아주 좋았다. 나도 아이들과 실행해 보고 싶었다. 봉선화 씨부터 구입하고 행사계획을 세웠다.

이듬해 봄, 씨를 뿌려 잘 가꾸었다. 여름방학 전에 ‘봉선화 축제’를 열었다. 천막을 치고 부스를 만들었다. 화단에 피어있는 봉선화를 관찰하여 그리기, 글짓기, 시 짓기, 봉선화 관련 보고서 차드 만들기, 손톱 물들이기, 스카프 물들이기, 축제일은 봉선화 천국이었다. 강당에서는 학부모들과 함께 봉선화 스카프 물들이기를 진행했다. 제주도에서 봉선화 꽃물들이기 전문가도 모셨다. 길이 1,5m 폭 40cm 정도의 보드라운 명주 천을 준비해 봉선화 잎과 꽃을 으깨서 자그마한 솥에 적당한 양의 물을 부어 섞고 아름다운 무늬가 생겨나도록 다양하게 접어 40도 정도의 약한 불로 30여 분을 대쳤다. 예쁜 추상화 스카프가 빨랫줄에 널려 장관을 이루었다. 마른 뒤, 다리미로 곱게 다려 포장하니 귀한 스카프가 제작되었다. 연구학교 발표를 끝내고 오신 손님들에게 나누니 찬사가 자자했다. 교장실에서 아이들의 손을 잡고 봉선화꽃 물들이던 때가 엊그제 같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그 추억은 잊을 수 없다.

내 딸들에게는 어릴 때, 이런 추억꺼리를 만들어 주지 못했다. 바다로 낚시 간다고, 서예 학원으로 붓글씨 쓰러 간다고, 친구 만나 술 먹는다고, 승진 공부한다는 핑계 등으로 늘 바쁘다고만 했다. 아이들에게 봉선화 꽃물 들여 주고 같이 다정히 놀아주지 못했다. 아빠의 사랑도 충분히 베풀지 못했다. 벌써 아이들은 중년이 되어간다. 지난날들이 후회스럽다.

서울에 살고 있는 딸들을 불러야겠다. 우리 집에 활짝 핀 봉선화 꽃잎 손톱에 꽁꽁 묶어 예쁜 꽃물을 들여 주어야 하겠다. 남은 꽃잎은 모아 냉장고에 넣어 두고두고 추억을 들이라고 할 것이다. 한번 들이면 3개월이 간다니, 봉선화 꽃물이 반쯤 빠지고 새 손톱이 하얗게 나와도 아름답게 보이지 않던가. 어린 손녀들에게도 봉선화 전설을 들려주면서 잊지 못할 가족 봉선화 꽃물 들이는 날을 가져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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