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49> 한국 고대문화의 원형, 마한문화의 특질(中)
복장(複葬) 풍습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고대 장례 풍속으로 일정 기간 장례 절차를 거친 다음 무덤에 안치하는 ‘복장(複葬)’풍습이 있었다. 함경도 남부 지역에 위치한 옥저에서 '골장제' 또는 '가족공동무덤'이라 불리는 장제가 그것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 옥저조에 그 내용이 자세히 실려 있다.
“장례 치를 때는 큰 나무로 곽을 만드는데, 길이가 십 여 장이나 되고, 그 윗부분에 출입구를 하나 낸다. ‘새로이 죽은 자는 모두 가매장을 하는데, 겨우 형태만 덮은 후 피부와 살이 썩으면 이내 뼈를 취하여 곽 안에 둔다.’ 집안 모두가 하나의 곽에 공동으로 들어가는데, 나무를 살아있는 형상처럼 깎는다. 죽은 자의 수와 같다.”
고구려에서도 “죽은 사람의 시신을 염하고 실내에 ‘빈(殯)’을 두었다. 3년이 지나면 좋은 날을 골라 장례를 치렀다. 부모나 남편의 상에는 상복을 3년 입었고 형제의 상에는 3개월 입었다”라 하여 ‘빈(殯)’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복장 풍습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역시 “사람이 죽으면 관렴(棺斂)을 하고 나서 고분이나 릉을 축조한 후 장례를 치렀다”고 하는 것에서 ‘복장’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무령왕의 지석을 통해 무령왕 부부가 복장을 행하였음이 드러났다.
마한의 장제 풍습은 정촌 고분의 출토 금동신발 등에 묻어 있는 파리 번데기 껍질의 분석을 통해 알 수 있다. 피장자가 사망하고 바로 고분에 매장되지 않고, 파리가 시신에 충분히 접근하고 산란할 수 있는 계절과 장소에서 금동신발을 착용한 상태로 최소 7일 이상 노출된 후, 파리가 시신과 함께 고분 안으로 들어가 매장되었음이 확인되었다. 곧 무덤 밖에서 일정 기간 장례 절차를 거친 다음 무덤에 안치되었음을 설명해주고 있다. 이를 통해 마한에서 최소한 7일 정도 지나 장례를 치르는 ‘복장’ 곧 ‘빈(殯)’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촌고분 피장자는 국왕의 신분
그런데 중국 최초의 율령인 태시율령(泰始律令)의 상장령에 천자는 7일 만에 빈을 한 후 7개월 만에 장사를 치르고, 제후는 5일 만에 빈을 하고 5개월 만에 장사를 치렀으며, 선비는 3일 만에 빈하고 3개월 후에 본장을 치른다고 나와 있다. 이를 따른다면 7일간 빈을 한 정촌 고분의 피장자의 신분은 천자에 속한다고 여겨지므로 적어도 마한왕국의 강력한 국왕의 존재를 살펴볼 수 있는 셈이다.
‘복장’은 대표적인 ‘후장(厚葬)’으로, “사람이 죽으면 여름철에는 모두 얼음을 사용하고 사람을 죽여 순장을 한다. 많을 때는 백 명 정도 되어 후히 장례를 치른다. 곽은 있으나 관은 없다”라는 데서 순장이 후장의 한 형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차츰 사람 대신 소나 말을 희생(犧牲)으로 삼아 순장 대용으로 삼았다. 마한에서도 "마한은 장례를 치를 때에만 소나 말을 썼다"는 위지동이전 기록에 따라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일본 기나이(畿內) 지방을 중심으로 소나 말을 참수하여 봉분에 넣은 형태의 제의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한반도에서 건너왔다고 하여 ‘한신(韓神)’으로 불렸다. 이러한 일본의 사례는 소나 말이 사람 대신 순장 대용으로 봉분에 묻혔을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부안 변산반도에 있는 죽막동 유적에서 사람 모양의 토우와 더불어 '토제마(土製馬)'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말을 순장 대용으로 사용하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곧 마한 지역에서 소·말을 제사 때 사용되는 제물이라기보다 ‘희생(犧牲)’으로 하여 봉분에 넣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당시 마한 사회에서는 일반적인 현상이었기 때문에 중국 측 기록에 역사적인 사실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마한은 소·말을 순장 대용으로 사용
나주 복암리 1호분에서 소뼈 1개체분이, 복암리 3호분에서 말뼈가 출토되었다. 특히 복암리 2호분의 동쪽 주구에서 소뼈 1개체분으로 추정되는 완전한 형태의 동물 뼈가 발견되었고, 그곳으로부터 동쪽으로 4∼5m 떨어져 있는 곳에서 말뼈로 추정되는 동물 뼈가 심하게 부식된 채 출토되었다.
특히 주구 동쪽 부분에서 발굴된 동물 뼈 가운데 소뼈로 추정된 뼈의 경우, 긴 목을 꺾어 동쪽으로 틀어놓았고, 네 다리는 함께 묶어 놓았던 듯 가운데로 가지런히 모아 있었다.
단순히 제물로 사용하고 버렸다면 여러 동강이로 분리되어 있어야 옳을 것이지만, 이렇듯 1개체가 목까지 꺾어져 있는 상태로 온전하게 발견된 것은, 순장용으로 바쳐진 ‘희생’이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즉, 복암리 고분의 출토 소·말뼈 유물들은 장례 치를 때 제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순장용'으로 사용된 '희생'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기록은, 마한 사회에서 소나 말을 순장 대용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복장은 옥저의 경우처럼 지하에 1차적으로 매장한 다음 꺼내 본장을 하는 경우는 극히 일부이고 대부분 지상에 안치하여 세골장을 겸하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남방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복장제가 영산강 유역을 포함한 전라도 지역에 뿌리내린 것은 영산강을 통해 남방의 농경문화 유입과 함께 이 지역에 형성된 조상 숭배사상이 결합된 것과 관련이 깊다.
이렇게 장례풍습에서 알 수 있다시피 기록에 보이는 마한의 특징이 영산강 유역 마한에서 그대로 확인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