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의병사(17)
■ 호남 의병의 선봉, ‘영암 의병’

‘영암 의병’은 을미년에 구림출신 최병손이 중심이 되어 최관묵과 구림대동계·열락제 학생들이 손을 잡고 의병을 조직했다. 총사에 최이익, 부사에 신종봉, 선봉장에 조태화 등 조직을 갖추고, “단발령 결사반대! 국모를 죽인 왜놈들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봉기했다. 사진은 구림 대동계의 집회소로 사용했던 회사정 전경.

최초의 을미 의병장 최병손

전기 의병 때 호남 의병봉기는 동학 농민전쟁 후유증으로 다른 지역보다 늦었다는 의견이 많다. 그러나 단발령 직후, 대규모 의병이 조직되어 활동하였다는 점에서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장성 의병’과 ‘나주 의병’이 대표적이다. 호남 의병을 상징하는 기우만이 올린 상소에서 “단발령을 환수하시고 옛 제도를 회복하시어 원수를 갚고 적을 토벌하는 대의를 팔도에 포고하시오면, 통분 망극한 우리 백성이 누구나 전하를 위하여 한 번 몸을 바치려 아니하오리까.”라 하는데서 국왕의 거병 교지를 기다리느라 거병이 늦어졌음을 살필 수 있다. 기우만이 거병 결심을 한 것은 1896년 2월의 아관파천이었다. 그는 전라도 각 고을 향교에 격문을 보내 의병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며, 장성향교에서 거병하였다.

(2월 7일) 기정진 제자들이 주축을 이룬다. 약 200명이다. 2월 2일 나주에서도 양반 유생·이족들이 중심이 되어 의병을 일으켜 단발령을 강요한 안종수를 처단하였다. 기우만은 의병을 일으킨 지 4일 만에 장성 의진을 나주로 이동시켰다. 장성·나주 연합의병부대를 결성하여 서울로 올라가려는 계획을 세웠다. 기우만이 고종의 해산 권고 조칙을 따르면서 2월말 기우만이 주도하는 의병부대는 사실상 해산하고 말았다.

나주 의병·장성 의병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영암지역에서도 의병이 조직된다. 조선 중기 유명한 학자 최경창의 후예로, 영암에서 석학으로 명성이 높았던 구림출신 최병손(해주 최씨)이 중심인물이다. 그는 과거 응시를 아예 하지 않았다. 단발령이 공포되자 기우만과 동문수학한 같은 구림출신 최관묵(낭주 최씨)과 연대하였다. 구림대동계·열락제 학생들과 손을 잡고 의병을 조직하였다. 최관묵의 아들 최규양도 의병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한다. 부자 의병인 셈이다.

총사에 최이익, 부사에 신종봉, 선봉장에 조태화를 추대하는 등 조직을 갖추고, “단발령 결사반대! 국모를 죽인 왜놈들은 물러가라!” 등의 기치를 들고 관아로 쳐들어가니 군수 정원성 이하 모든 관리들이 도망가기에 급급하였다. 이때 봉기에 참여한 인물로 이장헌·조경환 등의 이름이 전하고 있다. 곧이어 나온 고종의 해산 권고 조칙에 따라 거사의 뜻을 달성하지 못하였지만, 호남 최초의 ‘을미 의병’이라는 역사적 평가를 하여도 좋을 것이다.

‘영암 의병’에 영향을 끼친 ‘태인 의병’

을사늑약 체결을 전후하여 본격화된 중기 의병 활동 가운데 호남지역에서는 ‘태인 의병’이 대표적이다. 호남 최초의 중기 의병인 태인 의병은 봉기한 지 일주일 만에 포수 출신 200~300명, 유생 500명을 포함하여 900명이 되었다. 최익현의 제자·호남의 재지 유생으로서 신념이 확고한 인물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영암지역에서는 최기성·신준성·문윤백 등이 참여하였다. 순창에서 관군의 공격을 받은 최익현이 “동족끼리는 차마 싸울 수 없다”라고 하며, 의병부대를 자진 해산하였다.

체포된 최익현이 일본 쓰시마로 유배될 때, 유생들이 부산까지 수행하였다. 최기성·문규간·신준성 등 영암출신 유생들도 행동을 같이하였다. (음)11월 17일 단식 후유증으로 순국한 최익현의 유해가 부산에 도착할 때, 영암지역에서도 유생들이 ‘春秋大義 日月高忠’이라는 조기를 마련하여 부산까지 영곡하였다. 그가 죽은 지 1년이 지났어도 영전을 방문하는 사람이 그치지 않았고, 조객록이 4책이나 될 정도로 최익현의 죽음은 일반 백성들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최익현의 태인 의병은 10일간 짧은 활동이었지만, ‘상소 형태의 청원운동’을 ‘무장투쟁’으로 선회하여 후기 의병의 방향을 제시해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양반주도의 의병 운동은 무력 항쟁보다는 상소운동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한계가 있으나 태인 의병은 이를 극복하려 한다. 태인 의병은 전남 각지 의병봉기에 영향을 주었다.

최익현의 의병 활동은 영암 유생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최익현의 상가에 시묘를 6개월간 하고 돌아온 영암 유생 신매사(愼梅沙)는 “원수의 곡물을 입에 댈 수 없다”며, 식사는커녕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옥중 단식투쟁하다 순국하였다는 이야기를 영암 유생들에게 전하다 쓰러졌다.

이에 충격을 받은 영암 유생·청장년들이 열락제에서 의병을 조직하였다. 이 무렵은 1907년 (음력) 6월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조직된 ‘영암 의병’은 시기적으로 ‘중기’와 ‘후기’의 경계에 걸쳐 있다고 하겠다.

‘湖南倡義所’ 영암 의병이 결성되다

전남지역 중기 의병은 1906년 화순 쌍봉에서 유생 양회일·이백래 등이 조직한 ‘호남창의소’가 대표적이다. 1907년 화순을 점령하는 등 기세를 떨쳤다. 호남창의소 출범은 이웃하는 여러 지역의 의병 봉기에 영향을 주었다. 영암지역도 여기에 참여한 것 같지만, 기록이 나와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그런데 이들이 표방한 ‘호남창의소’ 명칭은 임실출신 이석용, 장흥출신 김영엽 등 여러 지역의 의병부대들이 사용하였다. 박평남·박민홍 등 영암 의병장들도 ‘호남창의소’를 부대 이름을 사용하였다.

박평남 의병부대

최병손이 중심이 되어 이미 전기 의병을 조직한 경험을 가진 영암지역에서는 빠른 속도로 의병부대가 결성되었다. 덕진출신 박평남이 같은 면 출신 신예교와 더불어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박평남은 1909년까지 영암지역에서 독자적 의병 활동을 한 인물이다. 1902년 영암을 방문한 최익현의 강론에 감동한 신예교는 의병부대 조직에 적극적이었다. 박평남이 처음 의병부대를 결성할 때 참여한 ‘영암 의병’은 대략 확인된 숫자만 90명이 넘으며 실제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박평남은 의병부대 명칭을 ‘호남창의소’라 하였다. ‘호남창의소’의 조직체계를 보면 위 표와 같다.

박평남 의병부대는 선봉장·중군장·후군장의 전통적인 3군 체계를 유지하였다. 심지어 식사를 책임지는 호군장·물자보급을 담당한 군량장·병기를 관리하는 병기감도 있어 전통적인 군제를 그대로 따랐다.

정규군의 편제를 갖추었다고 하겠다. 1908년 정월 박평남이 의거에 동참을 요구하는 격문을 내자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2월 무렵에 무려 600명이 넘는 의병이 참여한 의병부대가 결성된다.

박평남이 의병부대를 결성하려 한 시기를 신매사의 귀향 시기와 비교하여 추정할 수 있다면 1907년 9월 무렵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화순에서의 ‘호남창의소’ 편성과 최익현 순국, 고종의 강제 퇴위 및 군대해산 등도 의병부대 결성에 영향을 주었을 법하다. 따라서 ‘영암 의병’은, 후기 호남 의병 가운데 비교적 빨리 결성되었다고 하겠다. 전남지역 ‘후기 의병’의 선구라고 알려진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가 1907년 (음력) 9월 24일 결성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박평남의 ‘호남창의소’는 결코 늦게 결성되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계속>

박해현(초당대 겸임교수)·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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