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중 재 덕진면 노송리 송외마을生 전 광주시교육청 장학사 한국전쟁피해자유족 영암군회장 수필가

아침에 텃밭을 갔다. 장마가 계속되어 며칠 동안 가보지 못했다. 고추는 제대로 자라고 있는지 궁금하였다. 텃밭에 도착하자마자 까무러치게 놀랐다.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장마로 물소랑했는지 엊그제까지 싱싱했던 고추가 벼락 맞은 것처럼 누렇게 말라 죽고 말다니. 고추대가 땅에서부터 시커멓게 썩어 가고 있었다. 주인을 부르며 몸부림친 흔적이 보이는 것 같았다. ‘고추들아! 내가 미안하다! 얼마나 힘들었니?’ 누가 볼까 봐서 빠르게 고추대를 뽑기 시작했다. 아내는 남아있는 고추라도 따야 한다며 죽은 자식 만지듯이 이리뚜적 저리뚜적 얼리면서 죽은 고추가지에서 억지로 빨갛게 익은 것과 아직 싱싱한 것을 추려 따기 시작했다.

속상해 죽겠는데 아내가 서운 맘을 털어놓는다. “당신이 비료를 많이 뿌린 탓이 아닐까요?” 두 번째 열무 씨를 고추도랑에 심을 때, 복합비료를 몇 줌 뿌리고 계분퇴비를 뿌렸다. 열무는 하나도 싹트지 않았다. 싹이 나와도 농약을 뿌리지 않으니 눈 깜빡할 사이에 벌레 밥이 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고추도랑에 풀도 나지 않게 하고 부드러운 잎을 얻기 위해 열무 씨를 뿌려 작황이 좋았다. 두 번째는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비료기가 도랑에 잠겨 독으로 죽은 것이다. 엊그제까지 탐스럽고 사랑스럽던 고추들이…

텃밭에 가면 옆 도랑에 작물을 재배하는 A씨를 자주 만난다. “사장님은 얼마나 농사를 많이 지어 보셨으면 이렇게 농사를 잘 지으세요? 이런 큰 가지는 생전 처음 보았습니다. 생으로 가지포를 떠서 잡숴 보세요. 너무 맛있을 같아요. 열무도 밭고랑에다 그렇게 잘 재배하시고 청양고추도 최상품입니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원래 농촌에서 살다보니 조금 지어 본 것이죠. 다 하느님이 길러 주시지 않겠어요.” 그러면서도 나는 뽐냈다. 그분 밭도랑의 감자재배는 형편없이 풀만 길렀고 고추농사도 엉망이었다. “이 부근 밭에서는 내가 최고의 농사를 지을 거야!” 고추밭 고랑에 열무는 너무 많아 이웃들과 나누는 기쁨도 맛보았다. 무공해의 열무김치를 맛있게 담아 딸네들에게도 붙이고, 아들네에게도 부모의 정성을 나누었다. “금년 농사는 정말로 잘 지을 거야”하면서 자부심을 가졌는데 이 꼴을 보니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이번 기나긴 장마로 논밭의 작물을 잃고 인명피해며 재산피해가 전국으로 엄청난데 이런 것쯤이야 잊읍시다. 금방 가을무를 뿌리면 되니 너무 속상해 하지 마세요. 장마 때 고추도랑에 물을 뺐어야 했는데 방심한 탓이오. 고추는 열대식물이라서 도랑을 높게 해서 물 빠짐을 좋게 해야 하고 장마 때에는 고추잎을 가리기 위해서 비닐을 덮는 농가도 있답니다. 그런 수고를 하지 않은 대가를 치룬 것 아니겠소.” 아내가 위로해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에서 타온 고추가 세 봉지나 된다며, “냉장고에 넣어 두면 오랫동안 양념감으로 충분할 것 같소” 오저라 했다. 집에서 기르던 반려견이 죽으면 부모가 돌아가신 것처럼 장사 지내며 우는 사람들이 있다더니만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침 꿈속에 병상에서 신음하는 친구들이 보이더니만 고추가 대신 죽어 갔다니 이상야릇한 선몽이었다.

지난 농민주일 미사에 ‘쌀 한 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란 노래 한 곡을 들었다.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무게를 잰다/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외로운 별빛도 그 안에 스몄네/농부의 새벽도 그 안에 숨었네/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었네/세상의 노래가 그 안에 울리네/쌀 한 톨의 무게는 생명의 무게/쌀 한 톨의 무게는 평화의 무게/쌀 한 톨의 무게는 농부의 무게/쌀 한 톨의 무게는 세월의 무게/농부의 소중함을 알게 한다.

쌀 한 톨의 무게는 0,02g밖에 되지 않지만 그 한 톨이 생산되기까지 겪을 농부들의 수고로움에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오늘 아침에 내가 겪은 것 같은 일들을 농부들은 얼마나 많이 겪었고 앞으로도 겪을 것인가? 오늘 아침 뉴스에서도 연평균 강우량이 800mm인 우리나라인데 중부지방에 300에서 500mm 비가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다. 하늘을 가를 것 같은 천둥과 뇌성소리에 가슴이 떨린다. 창가에서 빗방울이 세차게 내리친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비가 올까?” 걱정스럽다. 기후가 급변하여 예측할 길이 없다니.

하루아침에 농장가축 수만 마리를 살 처분해야 할 때, 태풍으로 비닐하우스 수백 평이 날아가 길러 놓은 농장물이 전부 날아갈 때, 일 년 농사가 벼 도열병과 멸구로 내려앉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기분과 같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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