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40> 한국 고대사의 원형, 마한과 영암

대형 고분이 밀집된 시종·반남·복암리 일대의 거대한 고분군은 이곳이 마한 연맹왕국의 중심지였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사진은 시종 신연리 고분과 나주 복암리 정촌 고분에서 출토된 귀걸이 모습(아래 사진).

영암의 근현대사 인물 정리 서둘러야

필자는 8월 12일 경성의전 재학 중 광주 3·1운동을 주도하다 투옥되었던 독립운동가이자 의사(醫師) 김범수의 생애를 연구한 ‘민족을 사랑한 독립운동가 의사(醫師) 김범수 연구’라는 책을 출간하여 최근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가계(家系)조차 추적하기 힘들 정도로 자료가 빈약하기 없는 그의 삶을 작은 돛단배를 타고 망망대해에서 북두칠성의 별빛을 따라 항해하는 심정으로 추적하여 ‘독립의 길, 통일의 길을 선도한 의사’라는 역사적 평가로 자리매김하였다. 동시에 ‘친일의사’ ‘인민병원장’ 등 해방 공간에서 상대방을 쓰러뜨리는데 동원된 각종 수단이 그에게 집중된 까닭도 실증하여 그것이 우리의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이거나,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그의 삶은 물론 잘못 이해되고 있는 비극적인 한국 현대사를 새롭게 정리하였다고 자평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영암출신의 여러 인물을 필자의 저서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도 서둘러야 한다는 절박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의 불꽃 같은 삶을 통해 영암의 현대사를 복원하는 것은 영암의 정체성 확립과 관련하여 중요하기 때문이다.

영암의 교사들 교육도 이뤄져야

8월 12일 아침 중등 1급 정교사 연수를 받는 현직교사들에게 ‘마한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라는 주제로 특강을 하였다. 마한사가 한국 고대사의 뿌리라는 점이 명백하다고 필자가 누차 강조하고 있음에도 기존 학계는 전혀 꿈쩍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앞서 얘기한 필자와 같이 근무한 신정훈 교수처럼 기존의 백제 중심의 마한 주장에 회의적인 생각을 하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그나마 위안이 된다. 아울러 기존 통설이라는 것도 지극히 논거가 빈약한 것이기에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필자는 기회가 되는 대로 ‘마한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라는 주제로 강의, 강연, 원고 투고 등을 반복하고 있다. 왜냐하면 수십년 굳어진 이른바 묵은 때를 벗겨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 여기기 때문이다. 필자와 같은 연구자는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여야 함과 동시에 그것이 교과서에 반영되도록 하여야 한다. 동시에 학교 현장의 교사들은 교과서의 사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기보다는 새로운 학계의 경향을 교육과정에서 제시함으로써 학생들의 사고의 폭을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교사들의 교육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한 점에서 이번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에서 주관한 광주 교사들에 대한 특강에서 역시 필자 강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종지역의 고분군과 남해신사, 월출산 신앙 등 영암지역이 차지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수강생들이 현직 교사임에도 그들 역시 기존 통설에 이미 노출이 많이 되어 그들에게 필자의 주장은 생소한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필자의 얘기를 여러 차례 반복을 통해 마한사가 한국 고대사의 근원이고, 그 중심지가 영산 지중해라는 사실, 나아가 시종과 반남 일대가 특히 마한 연맹체의 심장부라는 사실을 수강생인 현직 교사들이 이해하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관점의 줄거리를 본란을 통해서도 몇 차례 언급하였지만, 아직 그것이 피부에 실감할 정도로 깊이 파고들지 못한 느낌이다. 하지만 필자나 본보는 끊임없이 마한의 심장이 영암이고 그러한 마한의 정체성을 영암에 계승하였기에 오늘날 다양한 영암문화가 형성된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미 언급을 여러 차례 하였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익숙한 내용이기는 하나, 아직도 기존 통설과 새로운 마한사가 서로 엉키어 제대로 정리가 안 되어 있음을 영암인들과 얘기하다 보면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뿌리박힌 백제 중심의 마한 통설 극복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새삼 알게 된다. 이는 끊임없는 반복 교육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동안 언급한 ‘한국고대사의 원형이 마한’이라는 결론을 다시 언급하고자 한다.
 
 

영산 지중해는 마한 문화의 발상지

마한 54국 가운데 ‘영산 지중해’ 마한 연맹왕국이 ‘마한 르네상스’ 문명을 창조해냈다고 하는 사실을, ‘복암리 아파트형 고분’과 창조적인 토괴(土塊. 진흙덩이) 양식이 사용된 ‘옥야리 방대형 고분’, ‘영산강식 토기’와 ‘옥’, 신창동 유적의 ‘비단’ 등 영산강 유역의 수많은 유적·유물에서 알 수 있다. 몽촌토성·부여·공주에도 없는 대형고분이 밀집된 시종·반남·복암리 일대의 거대한 고분군은 이곳이 마한 연맹왕국 중심지였음을 말하고 있다. 특히 영산강 유역에서 주로 출토된 옥, 복암리 고분에서 순장 풍습을 확인한 온전한 소뼈의 존재, 그리고 ‘복장(複葬)’이라는 장제 풍습을 확인해준 파리 유충의 흔적 등은 기록에 보이는 마한 풍습과 그대로 일치하고 있어 이 지역이 마한 문화의 발상지임을 말해주고 있다.

5세기 후반에 완성되어 일본으로 전파된 독특한 ‘집흔’ 문양이 있는 토기와 승석문 토기는 주로 영산강 유역에서만 출토되고 있다. 이 토기는 백제, 일본 토기와 비교되는 뚜렷한 지역적인 특색이 있다 하여 일본에서 ‘영산강식 토기’라 부르고 있다. 5∼6세기 무렵 영산강 유역에 유행한 이들 토기는 백제 지역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고, 형식적인 면에서도 구별되고 있다. 이 지역에 독립된 마한 정치체가 고유의 마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강력한 마한 남부 연맹체를 설정해야

이러한 마한의 고유한 정체성을 반영하고 있는 ‘영산강식 토기’는 마한 남부연맹의 강한 연대감의 상징이다. 이를 바탕으로 “마한인은 강건하여 치열하게 싸웠다”는 기록처럼 높은 자존감을 형성한 마한인은 외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았다. 이러한 힘을 지니고 있었기에 백제 근초고왕 군대가 아무리 힘이 강하다고 할지라도 굴복하지 않았기에 백제에서는 강진·해남반도에서 대국으로 위용을 떨친 ‘침미다례’를 공격하다 실패하자 남쪽 오랑캐라는 뜻으로 ‘남만’(南蠻)이라 하며 인정하려 하지 않거나 ‘도륙을 낸다’는 격한 표현을 쓸 정도였다. 침미다례 뿐 아니라 시종·반남 일대의 ‘내비리국’ 등 또 다른 마한 강국도 있었다. 이들 강국을 고구려에 밀리어 왜소해진 백제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한과 백제의 통합은 불완전한 통합

6세기 중엽 새로이 체제를 정비하여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수복하려는 백제는 마한 남부연맹과 통합은 시급한 과제였다. 바로 대등한 수준의 1대1 통합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통합과정에서 설치된 새로운 행정구역 15개 군이 모두 노령산맥 이남의 마한세력 중심지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백제가 마한 남부연맹의 존재를 현실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통합을 이룬 성왕이 마한계를 견제하기 위해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하자 마한계는 반발하였다. 무왕은 마한의 건국설화를 그의 출생설화로 변용하고, 익산으로 수도를 옮기는 정책을 추진하여 마한계를 포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마한계의 현실적 힘을 백제왕실에서는 제어할 수 없었다. 백제의 주도권은 마한계가 장악하였다. 신라에서 백제를 마한의 상징인 ‘응준’(응유)이라고 부르는 데서 이를 알 수 있다. 의자왕은 마한계를 견제하려 하였으나 정치적 갈등만 야기한 채 백제의 멸망을 초래하고 말았다. 이러한 결론은 단순한 마한사의 전개와 더불어 한국사의 발전과정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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