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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을 기억하며
정 희 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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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달로 6월 6일의 현충일과 6·10민주항쟁, 6·25전쟁으로 인해 호국 보훈의 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호국 보훈의 달에 우리 지역에서는 어떤 인물을 떠올릴 수 있을지 한 번쯤은 고민을 하게 된다. 우리 고장에서 나서 큰일을 하셨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은 큰 인물들을 다시금 기억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의병 김치홍(金致洪)은 영암 시종 출신으로 1908년 10월 심남일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기군장(起軍將)으로 활약하였다. 11월 화순 능주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09년 1월 박민홍 의병부대의 제일초십장(第一硝什長)이 되어 나주를 주 무대로 4월까지 활동한 후 박사화(朴士化) 의병부대에 들어가 여기서도 제일초십장(第一硝什長)에 임명되어 총기 12정으로 무장한 부하 26명을 거느리고 영암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9년 8월까지 영암과 나주를 중심으로 활약하였으며, 주로 군자금 확보와 친일세력을 제거하는 데 앞장서서 활동하다가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이 전개되던 1909년 9월 영산포에서 붙잡혀, 그해 6월 13일 폭동, 강도 및 살인죄로 교수형을 언도받았으며 같은 해 7월 대구공소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교수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의병장의 사당인 의홍사(義弘祠)는 2010년 시종면 신흥리에 준공되었다. 시절이 시절인 만큼 많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 부분은, 의병장의 다른 형제들도 의병으로 활동하였으나 기록을 찾지 못해 활동 여부를 알 수 없으나 태어난 신흥마을에서는 형제들도 의병에 참가하였다는 이야기만 전해져 와 안타까울 뿐이다.

구한말 최초의 여성 의병으로 18세 때 남편인 강무경 의병장과 함께 항일 유격전을 펼쳤던 양방매 여사는 1910년 대구 형무소에서 남편을 보내고, 금정면 남송리 반계마을에서 자식도 없이 홀로 고향에서 지냈다. 1986년 9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후 2005년 국가보훈처로부터 건국포장에 추서돼 남편과 함께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혔다. 생가 터에는 몇 그루의 나무가 있을 뿐 표지석도 안내판도 없다. 여성에 대한 대우와 인식이 낮고 사회참여에 많은 기회가 없었음을 알 수 있으며 여성 의병과 여성 항일투사들에 대한 연구와 조사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낭산 김준연 선생은 1895년 음력 3월 14일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 187번지에서 부친 김상경과 모친 청주 한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여 13살의 늦은 나이인 1908년에 영암보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영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으로 상경, 한성 고등보통학교(경기중학교·경기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다. 그 후 동경대학을 졸업한 후 독일로 건너가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정치와 법률학을 연구하였다. 이후 영국 런던 대학에서 수학한 뒤 귀국하여 1925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기자가 되어 한국 최초의 해외 특파원(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소련을 시찰했고 조선일보 논설위원, 전 조선공산당 당수 등을 역임했다. 그리고 1926년부터 민족주의자의 통합단체인 신간회(新幹會) 조직 준비에 참여하였다.

동아일보 주필 당시에는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게재하면서 가슴에 붙인 일장기를 지운 사건으로 주필을 사직한 일도 있었다. 해방 후에는 국회 제헌의원으로 헌법 제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3대에서 6대까지 국회의원을 하였으며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6월 1일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6·25 한국 전쟁 때에는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되어 내무장관과 함께 빈약한 장비로 무장한 경찰 병력과 함께 대구 사수에 임했고, 1·4후퇴 때에는 법무부 장관으로서 안전한 철수를 위한 계획을 입안하기도 했다. 해방 후에 일본이 남기고 간 재산 문제에 대한 대일 강화조약 초안을 수정하는 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초안에는 일본과 한국의 합의로 처리하는 걸로 되어 있었지만 초안 수정 후 한국의 재산으로 남기는 걸로 되었다. 그 후 부통령에도 도전하지만 실패하고 1971년 77세의 나이로 명상하는 자세로 운명하였다. 낭산의 유품은 오래된 회중시계와 현금 29원이었다고 한다. 낭산은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과 국민훈장 무궁화장으로 서훈(敍勳)되었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세계 경제에 영향력이 있는 G20 국가 중 하나로 우리나라를 있게 한 많은 별이 있었다. 하늘 위에 밝게 빛났던 별도 있었지만, 눈에 띄지 않는 별들도 역사 속에 무수히 많이 등장하고 사라졌을 것이다. 그중 우리 고장의 별들도 함께 기억하며, 가까이 있는 낭산 기념관에 들러 낭산 선생의 정신을 직접 느껴보는 건 어떨까 하고 제안을 해본다.

정희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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