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대한제국군 강제 해산하자 군인들 결사 항전 전개

명성황후 장례식 1895년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장례식. 이때부터 을미 의병 항쟁의 불길이 조선인의 가슴에 불타 올랐다.

갑오왜변·을미사변·단발령에 맞서다

최초의 한말 의병은 안동에서 일어났다. 갑오왜변이 발생하자 공주 유생 서상철은 1894년 7월 초 안동에서 2천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9월 1일 상주 태봉, 9월 20일 청풍 지역에서 일본군·관군 토벌대와 전투를 벌였다. 전직 관리 김원교는 황해도 상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상원 관아를 공격하였다. 동학 접주들에게 통문을 돌려 동학군 일부가 장수 산성으로 합류하기도 하였다. 해주부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다 관군과 일본 연합부대의 공격을 받았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대구 출신으로 진잠 현감을 지낸 문석봉이 9월 18일 유성에서 봉기하였다. 1천여 명의 의병과 선봉, 중군, 군향 등 지휘체계를 갖춘 의병 부대였다. 10월 28일 공주를 공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의병은 단발령 이후 진행된 의병 항쟁의 촉매제 역할을 하여 최초의 을미 의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김이언은 1895년 11월 단발령이 공포되기 직전, 만주에 거점을 두고 동학 접주 김창수(김구)와 함께 포수 300여 명을 모병하여 조직하였다. 단발령이 공포되자 국모 시해를 비판하는 격문을 발표하며 압록강을 건너와 관군과 싸웠다. 1896년 1월 18일 춘천 유생 정인회가 군인·상인 및 포군 400명으로 의병 부대를 조직하여 춘천 관찰부를 점령하였다. 이항로 제자인 이소응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관찰사 조인승을 처단하고 가평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였다.

여주 출신 민용호는 1896년 1월 30일 평창·영월·정선 지방의 포수로 의진을 구성하여 강릉부 관할 9개 군을 총괄한 ‘관동구군창의소’를 조직하였다. 친일관리를 처단하고,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원산을 공격하였다. 또한, 경북 영양의 김도현 의병·삼척의 김헌경 의병과 연합작전을 전개하였다. 민용호 부대는 9월 18일 함흥을 점령한 후 개마고원을 넘어 만주로 들어갔다.

전기 의병의 상징은 유인석이 주도한 제천 의병이다. 제천 의병은 1896년 1월 12일 안승우·이춘영이 조직한 ‘지평 의진’이 모태이다. 포수 400명을 포함하여 1천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원주 관아와 제천을 장악하고 일본군·관군과 장회나루에서 싸워 대승을 거둔 제천 의병은 부대를 영월로 옮기고 유인석을 총대장으로 추대한다. 유인석은 제천 관아를 접수하고 전국 유생들에게 고종의 명을 받아 의병을 일으킨다는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이라는 격문을 보내 거의를 독려하였다. 제천 의병은 단발을 강요한 단양군수 권숙과 청풍군수 서상기를 처형하고 2월 17일 충주성을 점령하고 충주 관찰사 김규식을 처단하였다.

안동부 관할 7읍의 맹주로 추대된 서상렬은 예천군수 유인형을 처단하고 안동 의병과 연합작전을 폈다. 충주부를 중심으로 중부지역 일대를 장악하며 기세를 올린 제천 의병은 5월 25일 관군·일본군의 집중 공격을 받고 패퇴하였다. 고종의 해산 권고 조칙을 거부하며 만주로 이동하여 항전을 이어갔다. 홍주 의병은 갑오왜변으로 사직한 김복한이 전직 관리 이설·안병찬 및 유생 100명으로 12월 3일 홍주부 내에 창의소를 설치하였다.

12월 4일 관찰사 이승우의 배반으로 김복한·이설 등 23명이 체포되었다. 청양군수 정인회를 중심으로 뭉친 홍주 유생들은 12월 7일 공주부 관군과 전투를 치렀다.

진주 의병은 1896년 2월 17일 노응규가 조직하여 진주성을 점령하였다. 노응규 의병진이 진주성을 점령하자 진주 부민들도 정한용을 대장으로 의병진을 결성하였다. 진주 의병은 수천 명에 달했으며 대구부에서 파견된 관군을 두 차례나 격파하였다. 노응규는 부산·함안·김해 일대까지 진출하여 일본군 수비대와 싸웠다. 이처럼 전기 의병이 일어난 곳은 대체로 진주·춘천, 제천 그리고 나주 등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갑오군공록’에 수록된 지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근왕적 성향이 강한 보수적 지역 분위기를 배경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중기 의병, 을사늑약에 반발

갑오왜변 때도 의병을 일으켰던 충청도 홍주 지역은 을사늑약 체결 후에도 의병을 조직하여 중기 의병 가운데 가장 큰 희생을 치렀다. 홍주 유생 안병찬·채광묵 등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906년 초 민종식을 총수에 추대하고 3월 14일 봉기하였다. 청양에서 첫 전투를 치렀으나 패배하였다. 부대를 정비 한 홍주 의병은 5월 19일 홍주성을 점령하고 일본 경찰 및 헌병대의 공격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서울에서 지원 나온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성이 함락되고 홍주 의병 수백 명이 전사하였다. 경상북도 영천에서 조직된 산남 의진은 임란 의병장 정세아 후손인 정환직·정용기 부자가 주도하여 1906년 3월 거병하였다.

고종의 시종관이었던 정환직은 고종의 밀칙을 받고 아들 정용기에게 의병봉기를 지시하였다. 청송·영천에서 활약한 정용기는 경주 전투에서 관군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1907년에 다시 의병을 봉기하였다. 정용기가 입암 전투에서 전사하자 정환직이 아들의 뒤를 이어 산남 의진의 대장이 되어 영천·경주 청송 일대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최익현이 임병찬이 주도한 태인 의병은 1906년 6월 전북 정읍의 무성서원에서 일어나 태인 관아를 점령하였다. 순창에서 출동한 진위대와 조우하였으나 태인 의병은 동족 사이에 싸울 수 없다며 의병부대를 자진 해산하였다. 체포된 최익현은 임병찬과 함께 일본 쓰시마섬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순국하였다. 임병찬은 뒷날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다.

군대해산과 함께 시작된 의병 전쟁

1907년 8월 1일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키자, 이에 항거한 군인들이 결사 항전을 전개하였다. 서울 시위대로부터 시작되어 원주·강화·홍주·진주 진위대로 확대되었다. 특히 원주 진위대는 특무장교 민긍호가 중심이 되어 의병을 일으켜 강원도·충북 일대에서 본격적인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고종의 퇴위와 해산군인들이 합류하면서 의병 전쟁의 모습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문경의 이강년 부대, 원주의 이은찬 부대, 영해의 신돌석 부대, 호남의 기삼연·심남일·이석용·전해산·안규홍 부대, 함경도의 홍범도 부대 등이 유명하다. 1907년 11월경에는 전국 연합의병의 성격을 갖는 13도 창의군이 결성되었다. 서울 수복을 목표로 1908년 1월 양주에 집결한 의병 수는 1만 명에 달했다.

창의대장 이인영, 군사장 허위, 관동 의병대장 민긍호, 교남 의병대장 박정신, 황해 진동대장 권중회, 관서 진동대장 방인관, 관북 의병대장 정봉준, 호서 의병대장 이강년, 호남 의병대장 문태수 등으로 조직되었다. 13도 창의군이 전개한 서울 진공 작전은 의병 전쟁의 성격을 국제법상 합법적인 교전단체인 독립군으로 변모시켰다. 일본군은 의병 부대들이 독립전쟁기지를 구축하는 등 장기전으로의 성격이 나타나자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2개월 간 소위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전개하여 호남 의병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 작전을 전개하여 수많은 호남 의병들이 순국하였다. 국권 피탈 후에까지 계속된 의병 전쟁은 독립전쟁으로 점차 발전되어 갔다.

의병, 독립군으로 전환하다

1912년 임병찬을 비롯한 의병계열은 비밀결사로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전국적으로 투서 운동을 전개하고 열강에 독립을 호소할 계획을 세웠다. 대부분 의병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국권 피탈 후 의병 대신에 ‘독립의군’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국권수호 차원을 넘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활동으로 전환하였다. 신민회가 취한 비밀결사를 지향하는 등 1910년대 이후 의병계열이 독립군으로의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대한광복회는 1915년 7월 대구에서 결성되었다. 1913년 풍기에서 채기중을 중심으로 창립한 광복단과 1915년 초에 대구에서 박상진을 중심으로 창립한 조선국권 회복단의 일부 인사들이 통합하여 조직하였다. 박상진이 총사령을 맡고, 부사령을 만주에 파견하여 독립군의 양성을 담당하게 하였다.

의병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며, ‘비밀, 폭력, 암살’ 등을 행동 강령으로 하였다. 일본인 광산을 습격하고 친일 부호를 처단하는 등 의열단체로 발전하였다. 1918년 조직망이 발각되어 박상진과 채기중은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임자밀맹단은 후기 의병을 이끌었던 진안 출신 의병장 이석용이 주도하여 1912년에 조직한 비밀결사이다. 이석용은 조직체를 결성하다 1914년 순국하였다.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거나 3·1운동에 뛰어든 의병들도 있다. 광주 출신 이기손은 1910년까지 의병 활동을 하다 만주로 탈출하여 독립운동을 하였고, 고흥 출신 이병채도 허위·유인석 의병부대 등에서 활약하다 만주로 망명하여 고려혁명군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광양 출신 황병학은 광양 백운산을 배경으로 활동하다가 5적 암살단을 주도한 기산도와 함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심남일은 의병부대 도통장으로 활동하다 3·1운동을 주도한 남평 출신 양도숙은 의병 수뇌부가 3·1운동을 주도한 대표적 사례에 속한다. 최익현도 의병에 참여하였고, 독립의군부에서 호남유사를 맡았던 김종주는 낙안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헌병의 총검에 팔이 잘려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만세를 부르며 시위대를 이끌어 ‘호남 의병’의 혼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고 창에서 후기 의병을 이끈 유장렬은 국권 피탈 후에도 의병 항쟁을 계속하다가 1915년 광복회에 합류한다. 광주 출신 부자 의병장으로 유명한 양진여의 아들 양상기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의 포위망을 탈출하여 미국으로 망명을 꾀하다 1909년 12월 체포되었다.<계속>

박해현(초당대 겸임교수)·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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