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우 초대석
■신북출신 민승연 전 전남도의원
뉴욕 ‘민주구락부’ 회장 때 ‘오 광주!’ 비디오로 광주의 진실 알려
광주항쟁 기록한 최초의 비디오 제작…한국 민주화의 촉매제 역할

신북출신 민승연(85) 전 전남도의원이 5월 20일 5·18민주화운동 40주년 및 UN·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등재 제9주년을 맞아 공로패를 수상했다.
5·18민주화운동 UN·유네스코등재기념사업위원회(이사장 김영진 전 농림부장관)와 세계한인교류협력기구가 공동 주최하고 (재)5·18기념재단(이사장 이철우)과 광주·전남종교인연합(상임대표이우송)이 공동 주관한 이날 기념행사는 오전 10시 30분 국립 5·18민주묘역에서 개최됐다.
민주, 인권, 평화에 헌신한 고 조비오 신부, 고 조아라 관장, 고 홍순남 변호사, 안성례 고문등과 함께 공로패를 받은 민 전 도의원은 미국에서 광주항쟁의 진실이 담긴 계엄군의 진실 은폐 현장과 민주화 항쟁을 이끌어 냈던 ’광주 비디오‘ 전파자의 숨은 공로자다.
민승연 전 도의원을 만나 ’광주 비디오‘(’오 광주!‘)에 얽힌 얘기를 들어 봤다.
<편집자 주>

■ 대담=문배근 대표

▲ ‘광주 비디오’(’오 광주!‘)는 처음 어떻게 만들게 되었습니까.

미국 뉴욕에는 한인회의 교민들이 모여 만든 '민주구락부'가 있었는데 당시 제가 회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1980년 5월 22일 저는 ABC 뉴스를 통해 광주항쟁의 소식을 접했습니다. 엄청난 소식을 접한 나는 다급한 마음에 한국으로 연락을 취했지만 당시 언론통제로 한국에 대한 정확한 소식을 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뉴욕에서 민주화운동을 해오던 박상증 목사를 찾아가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광주의 진실을 알릴 수 있는 비디오를 제작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자료를 모으던 그 무렵 재일조선인총연합회(이하 조총련)가 만든 비디오 ‘원한의 땅, 광주는 고발한다’라는 다큐멘터리를 입수했습니다. 조총련의 전위 조직이던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이하 한민통) 영화제작소 감독 니시다 테츠오는 조총련이 만든 ‘광주 비디오’의 감독과 친밀한 사이였습니다.

그는 ‘피의 항쟁의 기록’이라는 광주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1980년 6월에 제작했습니다. 이들 조총련과 한민통이 ‘광주 비디오’를 만든 이유는 일본인들에게 광주 민주화에 대한 상황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조총련이 북한과 밀접하게 연관된 단체로 알려져 있어 이들이 만든 비디오는 당시 광주항쟁에 북한군이 침투했다는 설의 근거로 여겨질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민주화 운동으로서의 광주항쟁’이라는 진실을 전달할 수 있는 비디오 제작에 착수했던 것입니다.

▲ 미국에서 ‘광주 비디오’는 어떤 반응이었나요.

1980년 5월 광주,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차지한 신군부 세력에 맞서 광주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왔고 곧이어 벌어진 참혹한 학살. 그러나 국내는 언론통제로 이 같은 사실이 일절 알려지지 않았지만 외국의 언론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광주에 잠입해 항쟁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영상을 기록했고 이 영상들은 일본과 독일, 그리고 미국으로 전파됐습니다. 비디오를 통해 고국의 비참한 소식을 접한 교민들은 구름처럼 몰려들어 항쟁의 진실을 접하고 눈물을 흘리며 분노했습니다.

비디오는 박상증 목사와 함께 다큐멘터리 제작 경험이 있는 미국인 여감독을 섭외해 일본 NHK, 독일 ARD, 미국 ABC와 CBS 등의 뉴스를 모아 재편집 했습니다. 비디오 시나리오는 당시 뉴욕에서 동아일보 기자로 있었던 심재선 씨가 맡았습니다. 이렇게 교민들의 노력으로 완성된 ‘광주 비디오’(‘오 광주!’)는 1981년 5월 18일 뉴욕의 한 학교 강당에서 처음 상영됐습니다.
 
◆ 계엄군의 진실 은폐 현장도 비디오에 담겼다고 들었습니다.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은 전남도청의 시민군들을 진압한 뒤 아침 7시 무렵, 미국 ABC의 짐 로리 기자는 진압에 나섰던 계엄군의 입장을 묻는 인터뷰를 했습니다. 당시 인터뷰에 나선 계엄군 대령은 시민군 2명의 사망자만 나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현장을 둘러본 외신기자들의 눈에는 적어도 100구 이상의 시체가 확인됐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KBS 9시 뉴스는 계엄군의 발표대로 폭도 2명의 사망을 기정 사실화하는 가짜뉴스를 보도했습니다. 계엄군에 사살된 시민들의 숫자는 처음부터 왜곡됐고 그마저도 불순분자들이 일으킨 광주사태를 진압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포장됐습니다. 하지만 당시 기록된 비디오는 발포 명령권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정황을 제공했습니다.

◆ ‘광주 비디오’가 어떻게 한국에 전파됐고, 그 의미는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뉴욕에서 만들어진 ‘광주 비디오’(오 광주!)는 교민들의 노력으로 국내에 밀반입돼 대학가와 성당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상영됐습니다. 서울 명동성당의 청년들은 1986년 5월, 열흘간 시민들을 대상으로 ‘광주 비디오’ 상영회를 개최했다고 하더군요. 구름처럼 몰려든 시민들은 깊은 한숨과 눈물을 흘리며 군부독재 타도 구호를 외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에 힘을 얻은 명동성당 청년회는 전국의 성당을 통해 상영회를 이어갔다고 들었습니다.

결국 이 ‘광주 비디오’는 국내로 밀반입돼 대학가와 성당을 중심으로 몰래 상영됐고 1987년 군부독재 타도를 외친 민주화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전 워싱턴 교민 고재형 씨도 “이 ‘광주 비디오’가 결국은 한국 민주화를 촉진해준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광주 비디오’는 단순한 기록물에 머물지 않고 1987년 민주화 항쟁의 불씨가 됐다. 그리고 ‘광주 비디오’를 통해 전달된 광주의 민주화 정신은 수많은 촛불집회를 통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편 지난 5월 15일 KBS는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특집 ’광주 비디오‘를 방영했다. 이날 전국에 방영된 ‘광주 비디오’에서는 40년간 공개되지 않았던 광주항쟁의 진실이 담긴 계엄군의 진실 은폐 현장과 민주화 항쟁을 이끌어 냈던 ‘광주 비디오’ 전파자들의 숨은 면면을 방송 최초로 공개됐다.

■ 민승연은?

 1935년 신북면 갈곡리 치릿마을 출생
 1957년 청주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 1970년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수료
 1995년 아태재단 아카데미 4기 수료
 1976년 뉴욕 한인회 이사장
 1982년 레이건 미국 대통령 방한 결과 백악관 브리핑 참석
 1984년 김대중 선생 귀국 강연회 행사주관
 1985년 김대중 선생 수행비서 임명(귀국)
 1987년 인권문제연구소 뉴욕지회장
 평화민주당 김대중 선거대책본부 대외협력 부위원장
 1991~1995년 전라남도 도의원 (영암2선거구)
 1996년 아태재단 중앙위원
 1999~2000년 셋방기업(주) 그룹 고문
 2001~2003년 재단법인 홍익회 경영전문위원
 2002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 중앙선대위 과학기술특위 부위원장
 2012년 민주통합당 서울특별시당 재외동포 특별위원장
 2017년 ㈜ K2넷 정보통신 경영자문위원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