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31>마한의 심장 시종과 진도(上)

시종 내동리 쌍무덤 고대 마한왕국의 중심지 시종지역은 경주의 대릉원보다 훨씬 많은 대형고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방치돼 고분 정비사업이 시급하다.

지난 호에 전라도가 4세기 후반에 백제의 영역이었다는 통설은 아직도 유효함을 언급했다. ‘마한’론을 아무리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은 우리만의 외침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필자가 누누이 강조하였지만, 객관적인 사실을 밝히려는 노력과 함께 방향성을 정립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 지역에서 일어나는 ‘마한’ 관련 세미나에서조차 4세기 후반 백제의 마한 지배설이 공공연히 주장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주장이 받아 들여지길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는 자조감이 든다. 해마다 ‘마한’ 관련 세미나가 심지어 국회에서까지 열리고 있지만 연례행사로 그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전남도에서도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고 있는 것 같다.

필자는 영산강 유역의 마한이 마한의 중심지였고, 그 마한이 한국 고대문화의 원형임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공부가 더해지면서 강해지고 있다. 따라서 일부 식자층이 알고 있는 마한론, 즉 한강 유역에 있는 마한 세력이 백제에 밀려 남하하다가 영산강 유역에서 소멸되었다고 하는 주장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 ‘마한’론은 영산강 유역의 마한이 마한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부에 해당되는 것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영암 시종과 나주 반남을 포함하는 거대한 ‘내비리국’이 영산 지중해의 대국이라는 사실을 일찍부터 이야기하였다. 시종 지역에 있던 중심부가 반남 지역으로 이동하였지만 두 지역은 같은 정치체를 결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필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유물이 2019년 7월과 2020년 4월 시종의 내동리 1호분(쌍고분)에서 연달아 나왔다. 즉, 1917년에 출토된 반남 신촌리 9호분의 금동관과 동일한 편들이 출토되어 두 지역이 단일한 정치체였음을 알려주었다. 시종지역은 고대 마한왕국의 중심지였다. 이 지역에는 거대한 봉분들이 수십 기가 분포되어 있어 화려했던 마한의 영광을 웅변하여 주고 있다.
 
시종지역 고분 정비 서둘러야

경주의 대릉원보다 훨씬 많은 대형고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가와 섞여있는 데다 소나무 숲으로 우거져 있는 등 정비가 되지 않아 그 위용을 쉽게 찾을 수 없다. 이번 내동리 1호분 발굴비만 하더라도 최종 마무리하는데 10억원 이상이 투입되는 등 고분을 발굴 조사하는데 드는 비용은 가히 천문학적이다. 가야지역은 김대중 정부 때 무려 2천억원 이상의 국비가 투입되었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수백억 국비가 투입되고 있다. 마한역사의 중심지인 시종 지역의 고분 발굴·조사·연구·보존·관리에 국고가 과연 얼마나 투입되었는지 묻고 싶다. 그렇다고 한정된 지방정부 예산으로 이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마한왕국의 중심지인 시종지역의 역사를 살피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는 마한왕국의 실체에 한 걸음 접근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시종지역에는 특이하게도 진도지역의 행정구역 명칭이 보이는 등 진도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이 남아 있다. 이에 대해 향토사학자는 물론이거니와 적지 않은 영암출신 인사들이 잘 알고 있다. 필자는 영암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이를 알게 되었다. 오늘은 이에 대한 얘기를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시종의 명칭은 1914년 일제에 의해

영암에 진도 땅이 있었다면 믿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시종면의 절반 가량이 시종과 멀리 떨어져 있는 진도군의 행정구역에 550년 넘게 속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시종이라는 지명은 1914년 조선총독부가 행정구역 개편 때 만든 면 명칭이다. 1910년 8월 29일 조선의 국권을 강제로 빼앗은 일제는 1914년 전국의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다. 이때 행정구역 개편 의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남평군을 남평면으로, 창평군을 창평면으로 격하시켜 각기 인근의 나주군과 담양군의 예하 행정구역으로 편입시킨 일이다.

이들 두 지역은 1907년 말부터 치열하게 전개된 후기 의병의 주된 전장 터였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창평은 지리산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하다 장렬하게 산화한 고광순이 의병을 일으켰던 곳이고, 남평은 일제가 거괴(巨魁)라고 명명한 김태원 형제를 비롯하여 박사화·박민홍 의병장 등 수 많은 나주와 영암의 의병들이 일본군과 치열한 격전을 치른 항일의 고장이었다. 따라서 일제는 이들 행정구역의 격을 군에서 면으로 떨어뜨려 이들 지역의 힘을 약화하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종지역의 행정구역 개편작업도 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도 든다.
 
진도 명산면이 시종에 편입돼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 시종은 영암군 종남면과 명산면 및 북이시면을 합해 시종이라 하였다. 이 가운데 명산면은 원래 진도군에 속한 것인데 이미 시종에 편입되기 8년 전에 진도군에서 영암군 소속으로 바꾸었다. 일제에 국권이 넘어가기 전에 이미 명산면의 소속이 진도에서 영암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총독부가 행정구역 개편을 끝내고 만든 ‘신구대조 조선군 면리동 명칭일람’에 따르면 통합 직전의 명산면은 오늘날 시종면의 만수리, 태간리, 월악리 등 3개 리와 내동의 화산, 월송의 송산이었다. 그런데 이들 마을들은 오늘날의 마을 분포로 보면 현실감이 없이 분산되어 있다. 예를 들어 월악리는 나주 반남과 경계를 이룬 마을로, 명산면이었던 만수리와의 사이에 금지리와 월롱리가 끼어 있어서 10리 가량 떨어져 있다. ‘진도읍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을 보면 진도군은 왜구의 해적질에 쫓겨 진도군청은 물론 진도 주민들이 배를 타고 영산강을 거슬러 덕진에 이르러 월악에 자리를 잡고 피난 군청을 운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피난 군청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왜구를 견제할 수 있었던 1409년(태종9)까지 무려 59년간 이곳에 있었다. 진도군 임시 군청은 1409년 해남현 원진으로 옮겨 해진군을 이뤘고 아직 진도에까지 들어가지 못하도록 통제하였다. 조선 정부는 1437년 세종 19년 진도에 남도만호 등 수군을 배치한 뒤 주민이 들어가 살도록 허락하고 진도군을 복설하여 주었다. 이처럼 보배의 섬이라고 알려져 있는 진도의 수난사를 시종지역에 있는 진도 행정구역 명칭의 변동을 통해 알 수 있다. 진도는 섬이라기보다 오히려 육지라고 할 수 있는 넓은 면적에다 평야도 곳곳에 분포해 섬 주민들이 풍요로운 삶을 누렸다. 거기다 넉넉한 해산물은 진도 주민들이 평화롭게 삶을 영위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보배롭다는 뜻을 지닌 ‘진도’ 명칭이 유래된 배경이라 하겠다.

필자는 10여 년 전 진도 국립국악원에서 진도 씻김굿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망자를 위로하는 굿에 등장하는 인물들 대부분이 여인이었고, 씻김굿이 슬픔으로 그치지 않고 기쁨으로 승화하려는 내용에 충격을 받아 그 배경이 궁금하여 조사한 적이 있다. 평화로운 섬에 슬픔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략하기 위해 진도를 교두보로 삼으면서였다. 진도 주민들은 영문도 모르고 침략자인 왕건 군대에 맞서다 죽어갔다. 그러다 몇백 년이 지나 진도에 전쟁의 공포가 또다시 엄습해온 것은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 군이 강화도에서 진도로 부대의 근거지를 옮기면서였다. 진도 주민들은 침략자에 맞서 싸우다 죽었고, 살아난 사람들은 삼별초군에 강제로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삼별초군이 제주로 후퇴한 후에는 9개월 동안 삼별초에 협조하였다 하여 반란군으로 몰려 수없이 죽임을 당하고 몽고에 끌려갔다. 이때 너무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는데 대부분 남자들이었다. 심지어 장례를 여자들이 치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없이 슬퍼할 수도 없었다. 곧 산자들은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씻김굿이 환희의 모습을 띤 것은 이 때문이었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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