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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에 뛰어든 영암출신 고 문용동씨군서북초등학교 나와 호남신학대 재학 중
시민군 합류해 도청 탄약고 관리 중 숨져
가족·친구 만류에도 도청 사수 '순교자의 삶'

올해로 5·18민주화운동이 40주년을 맞았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는 1980년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해 시위하던 학생과 시민을 무차별 학살했다. 당시 현장에는 영암출신도 있었다. 도청을 끝까지 사수하다가 숨을 거둔 고 문용동(1952~1980) 전도사가 장본인이다.

그는 1952년 군서면 문순봉·김봉님의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군서북초등학교를 졸업하자 1965년 부모를 따라 광주로 이사하여 조선대학교 부속 중·고등학교를 거쳐 호남신학대학에 진학했다.

1980년 당시 호남신학대 4학년이던 문 전도사는 처음부터 시위에 적극 참여한 건 아니다. 5월 10일자 그의 일기장에는 “저 소요사태(민주회복운동, 학원자율화, 계엄해제…)를 먼발치에서 구경만 하고 난 그냥 있어야만 하는가”라고 적혀 있다.

18일자 일기에서는 “무자비한 공수부대, 곤봉과 군화 발질로 학생들을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기고 군화로 짓이겨 군용 트럭에 싣는다. 학생이나 시민이나 달려들어 개 패듯이 끌고 간다. 목사님(항의하는)도 군화 발질을 당했다”면서 “심는 대로 거둔다. 개인이건 사회건 국가건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고 적었다.

문 전도사는 군인에게 폭행당하고 있던 한 시민을 구했다. 일기장에 ‘반기절한 시민’을 도보로 40분이나 걸리는 기독병원으로 데리고 가 치료를 받게 했다고 썼다. 문 전도사는 이 일을 계기로 5·18 항쟁에 뛰어들었다.

당시 문 전도사는 초급장교를 교육하는 상무대에서 사역하고 있었다. 문 전도사가 시위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교회에 알려졌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지만 “세상이 어렵고 민중이 고통당하는데, 이럴 때 목사들이 앞장서 나가야 한다”고 했다.

시민군에 합류한 문 전도사는 도청 지하에 있는 탄약고를 관리했다. 당시 탄약고에는 총기류, TNT, 다이너마이트, 수류탄 등이 보관돼 있었다. 문 전도사와 함께 탄약고를 관리했던 5·18 민주 유공자 김영복씨는 “군 무기고만큼 많은 물량이 있었다. 탄약과 폭약이 일시에 폭발했다면 광주는 잿더미가 됐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해야겠다고 판단, 5월 25일 밤 9시경 군 전문가를 데려와 뇌관 제거작업을 했다. 그 후 한발 물러나 있던 계엄군이 다시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퍼졌다. 26일 문 전도사의 누나들과 친구들이 찾아와 철수하자고 요청했다. 문 전도사는 거절했다. 도청을 끝까지 사수할 것이고, 만일 자신이 숨지면 태극기로 덮어 묻어 달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계엄군은 27일 새벽, 도청 진압에 나섰다. 문 전도사는 이때 계엄군의 총에 숨을 거두었다.

한편 뇌관을 제거했다는 이유로 계엄군의 ‘프락치’ 의혹을 받기도 했던 문 전도사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를 둘러싼 오해가 벗겨졌다. 호남신학대학은 2000년 2월 문 전도사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다. 2006년에는 추모사업회가 조직됐고, 이듬해부터 순교기념 학술대회가 열리고 있다. 2012년 추모사업회는 문용동전도사기념사업회로 이름을 바꿔 문 전도사 추모 자료집 ‘새벽길을 간 이’를 펴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은 2016년 9월 그를 순직자로 인정했다.

또 기념사업회는 신앙의 내적 동기에 따라 그리스도를 본받는 행위를 했다며 총회에 ‘순교자’ 추서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배근 기자  mbg11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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