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30>개정 역사 교과서와 마한사 서술(하)

‘삼한, 백제·신라·가야의 토대가 되다’ “천안·익산·나주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고, 김해·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변한과 대구·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진한은 각각 12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다. 삼한 가운데 마한의 세력이 가장 컸다. 마한 소국 가운데 하나인 목지국의 지배자가 마한 왕 또는 진왕으로 추대되어 삼한 전체를 주도하였다.” ‘삼한, 백제·신라·가야의 토대가 되다’라는 소제목 아래 서술된 2009년 개정 한국사 교과서에 실린 마한에 관한 내용이다.

역사 교과서의 중요성

학교에서 역사 수업은 주로 교과서에 의존하여 이루어지고, 학생들은 역사 교과서를 통해서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 교과서는 학생들의 역사적·정치적 의식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몇 년 전 박근혜 정부가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려는 데 대해 역사학자를 비롯하여 많은 국민들이 반발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따라서 역사 교과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역사 교육의 현실이 자세히 분석돼야 한다. 필자가 마한 관련 교과서 서술이 어떤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살펴보려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마한에 대한 인식을 통해 고대사에 대한 인식, 나아가 역사를 보는 관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 있는 것과 서로 통하기 때문이다.
 
개정 교육과정에 축소된 마한사

2015년 개정 교육과정 직전 교육과정인 2009년 개정 교육과정 때의 한국사 교과서에는 마한에 관한 서술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었다. ‘삼한, 백제·신라·가야의 토대가 되다’라는 소제목을 정한 후 삼한이 한강 이남 지역의 국가 토대였음을 설명하였다. 해당 부분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천안·익산·나주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고, 김해·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변한과 대구·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진한은 각각 12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다. 삼한 가운데 마한의 세력이 가장 컸다. 마한 소국 가운데 하나인 목지국의 지배자가 마한 왕 또는 진왕으로 추대되어 삼한 전체를 주도하였다.”

삼한 가운데서 마한의 세력이 컸다고 하는 사실과 나주지역이 마한의 중심지의 하나임을 밝혔다. 마한 왕이 삼한을 주도하였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이러한 서술은 그 이전의 교과서에서도 커다란 차이가 없었다. 그러던 것이 지난 호에 언급한 2015년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소제목부터 달라져 있다. ‘옥저와 동예, 삼한의 성립’이라는 소제목으로 삼한을 옥저, 동예와 동급으로 취급하고 있다. 옥저와 동예는 지금의 함경도와 강원도 북부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다. 그렇게 작은 연맹체인 옥저와 동예를 한반도 중·남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삼한과 동격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2009년 교육과정에서는 ‘옥저와 동예, 연맹왕국으로 발전하지 못하다.’ ‘삼한, 백제·신라·가야의 토대가 되다’와 같이 분리되었던 것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심한의 서술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더구나 ‘옥저와 동예, 삼한의 성립’의 소제목에 딸린 내용도 “한반도 남부에서는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이 성립하였다. 삼한은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성립한 여러 소국의 연합으로 이루어졌다. 각 소국은 신지·읍차 등의 군장이 통치하였고, 천군이라는 제사장이 소도에서 종교의례를 주관하였다. 이처럼 삼한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사회였다. 철기문화가 발달하면서 삼한 사회에서는 변화가 나타났다. 마한지역은 백제에 통합되었고 진한 지역에서는 사로국이 신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변한 지역에서는 가야 연맹이 성장하였다”고 하여 삼한의 정치적 발전보다는 소도와 같은 삼한 사회의 종교적 특징을 언급하는 데 그쳤다. 2009년 개정 교육과정과 비교하여 볼 때 내용 면에서도 마한의 서술내용이 빈약함을 알 수 있겠다. 천안, 익산, 나주 지역이 마한의 중심지였다는 내용도 물론 빠져 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삼한의 비중이, 그것도 마한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많이 줄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전체적으로 현대사의 비중이 늘어나면서 고대사의 서술 비중이 낮아지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역사가인 크로체(B.Croce)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하여 현대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물론 우리와 가장 가까운 직전의 역사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역사의 근원인 고대사를 비롯하여 고려, 조선 시대 등 각 시기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가 모두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역사란 긴 연속선 상에서 살필 때 비로소 역사적 진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마한사 축소는 마한론 주장과 관련돼

그렇다고 고대사의 비중이 줄어졌다고 하여 현재 한국 고대사의 한 축인 한반도 중남부 역사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마한사 서술을 함경도와 강원도 일부 역사에 불과한 옥저, 동예와 같은 비중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이것은 어쩌면 삼한사의 비중을 줄이려고 하는 또 다른 의도는 없는 것인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마한사 서술 비중이 낮아지는 것은 최근에 영산강 유역의 고고학적 유물의 발굴로 독자적인 마한론이 주장되는 등 그동안 4세기 후반 백제의 영역에 포함되었다는 이병도의 학설이 비판되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지 않나 여겨진다.
 
근초고왕 마한 병합설이 교과서에 서술돼

마한이 한국 고대사의 뿌리라고 하는 사실을 입증하는 고고학적 유물은 물론이거니와 문헌 기록도 헤아릴 수 없이 나오고 있다. 2009 교육과정과 마찬가지로 2015 교육과정 때도 마한이 4세기 중엽 근초고왕 때에 백제에 병합되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필자가 본란을 통하여 여러 차례 주장하고, 지난 호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4세기 중엽 백제의 마한 병합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꿈쩍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4세기 중엽 백제의 마한 병합설을 주장하는 일부의 생각이 마한사의 서술 비중을 더욱 낮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는다. 필자의 이러한 생각이 억측이길 바란다.

새로운 관점에서 교과서 서술이 필요하다

한편 마한 사회의 특성을 살필 수 있는 중국 기록은 많다. 이를테면, “마한인들은 비록 싸우고 공격하는 일이 있더라도 서로 먼저 굴복하는 것을 소중히 여긴다.”라는 진서 기록이 있다. 이는 마한 사회가 독립적인 연맹체를 유지하면서도 문화적 동질성을 지니고 상호 경쟁과 협조를 하였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사료이다.

5·18민주화운동에서 발현되는 ‘나눔·배려·공동체 정신’이 이미 이 때에 나타나 있음을 살필 수 있다.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는 뜻깊은 주간을 맞아 새삼 한국 고대사의 원형을 형성한 마한사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아울러 “마한사람들은 성질이 몹시 용맹스럽고 사납다”라는 역시 진서 기록도 마한인의 강건한 기질을 보여주는 것으로 외세의 침략에 끝까지 저항하였던 이 지역의 항쟁정신을 또한 느끼게 된다. 이렇듯 마한 사회의 성격을 살필 수 있는 사료를 교과서에서 소개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 동안 ‘소도’(蘇塗) 관련 내용만 반복되어 소개되고 있다. 균형 잡힌 역사 인식을 지닌 교과서 집필진의 구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겠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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