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29>개정 역사 교과서와 마한사 서술(上)

시종 옥야리 고분과 월출산 마애불 최근 시종 쌍무덤(雙古墳)에서 출토된 금동관(편)은 인근 반남지역과 하나의 정치체임을 보여주고, 고대 마한왕국의 중심지였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또한 월출산 마애불(사진 오른쪽) 등 수많은 불교 유적지는 마한시대에 영산 지중해를 통해 불교가 유입되어 전파된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마한 문화의 뿌리는 영산 지중해

그동안 필자는 본란을 통하여 이 지역의 마한사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노력을 많이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마한사에 관심을 가진 적지 않은 영암인들이 필자에게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동안 필자는 마한이 한국 고대사의 뿌리이고, 그 중심에 영산 지중해인 영암 시종과 나주 반남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기록을 통해서도 쉽게 확인되고 있다고 하였다.

즉, 중국 기록에 마한에서 진한·변한이 나왔고, 백제가 나왔다는 사실이 중요한 근거이다. 마한이 한국 고대사의 원뿌리임을 말해준다. 일본에서 ‘백제(百濟)’를 칭하는 ‘구다라(くだら)’도 실은 ‘마한’을 상징하는 ‘매(鷹)’에서 비롯되었다. 마한이 일본 고대문화의 원류임과 동시에 마한이 한국 고대사의 중심에 있음을 말해준다. 마한은 6세기 중엽까지 한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였다고 하는 사실이 새롭게 확인되고 있다.

마한 54국 가운데 ‘영산 지중해’의 마한 연맹체들이 ‘영산 르네상스’ 문명을 창조해냈다. 영산강 유역의 수많은 유적·유물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몽촌토성·부여·공주에도 없는 대형 고분들이 밀집되어 있는 시종·반남 일대의 거대한 고분군들은 이곳이 마한의 중심지였고, 대국이 존재하였음을 알려준다.

해남·강진 일대의 ‘침미다례’, 영산 지중해의 ‘내비리국’, 영암지역 ‘일난국’, 다시들 유역 ‘불미국’ 등이 그들이다. 이들 왕국은 ‘용맹스러움’을 뜻하는 ‘응류(응준)’로 상징되는 마한 연맹체를 구성하였다. 이곳에는 토착적인 요소에 낙랑, 백제, 가야, 왜 등 각 나라의 다양한 문화요소가 융합되어 독창적인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문화의 특징이 보성강, 섬진강 유역에도 영산 지중해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나타나고 있어 역시 같은 마한 연맹체의 세력권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은 3세기 말 백제의 팽창에 맞서 마한 남부연맹을 결성하였다.
 
금동관(편)은 강력한 왕국의 존재 확인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의 보주가 달린 3단의 가지 장식은 백제나 신라 양식보다는 가야나 왜 계통에 가깝고, 같은 곳에서 출토된 환두대도 또한 기본형은 백제에 가까우나 환내도상을 별도로 끼워놓은 것은 대가야 계통과 유사한데다 제작 기법도 무령왕릉보다 시기가 앞선다. 이로 보아 반남지역 왕국에서 제작한 왕관임이 분명하다.

2019년 7월 신촌리 9호분 출토 왕관의 영락(瓔珞)과 동일한 ‘편(片)’, 그리고 금동관 가지에 해당하는 편이 2020년 4월 역시 반남과 인접한 시종 쌍고분(雙古墳)에서 출토되어 두 지역이 하나의 정치체임을 알려주었고, 고대 마한왕국의 중심지였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미 군장 사회 단계를 벗어나 강력한 권력을 지닌 왕국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영산강식 토기, 토착세력 존재 확인

이 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은 지역의 독자적 정치체를 설명해주고 있다. 5세기 후반에 완성되어 일본으로 전파된 토기 가운데 독특한 ‘집흔’ 문양이 있는 토기가 있다. 이 토기는 주로 영산강 유역에서만 출토되고 있는데, 역시 같은 지역에서만 출토되는 승석문 토기와 더불어 백제, 일본 토기와 비교하여 뚜렷한 지역적인 특색이 있다 하여 일본에서 ‘영산강식 토기’라 부르고 있다.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5∼6세기 무렵에 유행한 이들 토기는 백제 지역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고, 형식적인 면에서도 구별되고 있다. 백제에서 주류를 이룬 유개고배, 전형적인 직구단경호 등이 6세기 무렵에 이르러 영산강 유역에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고유한 영산강식 토기 전통이 6세기 전반까지 유지되었음을 알려준다. 이는 이 지역 토착 세력의 강력한 힘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런데 가야 계통의 방사상과 일본 계통의 원형 양식을 융합하여 창안된 영암 시종 옥야리 방대형 고분 토괴(土塊) 축조 양식이 가야·일본 지역으로 다시 전파되고 있는 데서 재지 세력의 강고한 토착성에다 외래 요소가 가미된 이 지역의 개방적인 문화 특징을 엿보게 한다. 이러한 개방적인 문화는 삼국 이전에 이미 마한시대에 영산 지중해를 통해 불교가 유입되어 전파되고 있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옥은 마한의 문화 상징이다

마한 사람들은 금은보다 옥을 중시하였다는 중국 기록을 통해 마한인과 옥이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옥은 마한의 상징인 것이다. 지금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내동리 쌍무덤에서 이미 도굴이 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옥 유물이 상당수 나오고 있고, 복암리 정촌고분을 비롯하여 영산강 유역의 여러 고분에서 1천 점이 넘는 옥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이처럼 마한 시기의 옥 유물이 주로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차령 이남 지역에서 보인 반면, 차령 이북에서는 상대적으로 적게 나온다. 이렇게 보면 중국인들이 인식한 옥을 사랑하였다고 하는 마한인은 차령 이남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차령 이남 가운데서도 영산 지중해가 마한의 핵심지역임을 알 수 있겠다.

그런데 마한에서 백제가 나오고, 마한에서 변한·진한이 나오고, 변한에서 가야가, 진한에서 신라가 나왔다고 한다면 한국 고대사의 원형은 마한임이 분명하다 하겠다. 그러므로 한국 고대사는 마한 중심으로 서술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최근 광주광역시교육청에서 펴낸 인정 역사 교과서에서 마한의 역사는 완전히 사라져 충격을 주고 있다.

개정 교과서에 마한사가 점차 사라져

2020년 3월부터 학교 현장에 보급된 2015 개정 교육과정에 입각하여 새롭게 서술된 한국사 교재는 마한사를 어떻게 서술하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이들 교과서에 서술된 마한사를 통해 마한사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려 하였다. 이는 사학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두 출판사의 고교 한국사를 구하여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마한사는, 역사에서 사실상 사라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교과서에 수록된 마한사 관련부분을 그대로 옮겨본다.

“백제는 부여와 고구려에서 내려온 이주민과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이 연합하여 성립하였다. 하남 위례성을 수도로 삼은 후 마한의 소국들을 제압하여 성장하였다.”
  백제의 성장 과정에서 마한을 병합하였다는 단 한마디가 언급되었다. 마한의 실체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이다. 이미 연구가 상당히 진행되어 구체적으로 실체가 드러나고 있는 영산 지중해 마한의 실체를 애써 외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같은 쪽에 있는 변한 관련 내용은 이보다 상세히 언급되어 있다.

“변한 지역에서는 여러 소국이 가야 연맹을 이루었고 3세기경에는 김해의 금관가야가 연맹을 주도하였다. 금관가야는 5세기경 신라를 지원한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쇠퇴하였다.”

변한 지역에는 가야 연맹이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고 언급돼 있다. 곧 마한 기술에서 제외된 왕국의 실체를 가야시대 서술에서는 드러내려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교과서의 서술은 마한사의 서술이 역사의 관심에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 일부로 인식하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는 그동안 ‘백제의 마한’이 아니라 ‘마한의 백제’라는 인식으로 전환돼야 한다는 주장이 교과서 서술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 문제를 다음 호에서 보다 자세히 살피고자 한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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