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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병들 스스로 외적에 대항해 싸웠던 구국민병임진왜란, 을미사변 등 나라가 위급할 때마다 항전
영암 의병사(9)
■임진왜란과 영암의병
완도 고금도 충무사 임진·정유왜란 때 많은 영암 의병들이 이순신·고경명·김천일 막하에서 싸웠다. 심지어 3부 자·3형제가 참전하여 순국한 경우도 많았다. 사진은 사적 제114호로 지정된 완도 고금도 충무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이곳에서 임진·정유재란 때 왜군 30만 명을 무찔렀다.

전여홍(全汝弘)

자는 관숙이요, 본관은 천안, 병조참판에 증직된 몽성의 아들이다. 영암 서호 엄길리에서 1578년에 태어났다. 일찍부터 무예에 뛰어났고, 변란을 당하여서는 참판공이 함평 현감으로 의병을 일으켜 조헌과 초토사 고경명을 따라 금산에서 왜적을 공격할 때 공의 나이 20세가 못되었으나 군무에 종사하면서 집안 일처럼 잘 처리하였다. 정유년(1597년)에 아버지의 뜻에 따라 무과에 올라 곧 제포만호에 제수되었다. 부임하자 곧 성을 쌓고 병선을 수리하고, 군대를 훈련하며, 군량미를 확보하였다.

1597년 9월 아버지가 해암포 전투에서 순절하니 여홍은 통곡하여 이르기를 “주상께서는 몽진해 계시고, 아버지는 나라 일로 죽으니 신자(臣子)된 도리는 다하였으나 맹세코 하늘을 같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원수를 꼭 갚아야 한다.”하고 상주의 몸으로 다시 일어나 군사를 이끌고 통제사 이충무공의 진영으로 나아가 군모(軍謀)에 협찬하였으며 분용독전(奮勇督戰)하여 고성 한산, 노량, 묘도의 싸움에서 연전연승하였다. 다음 해 11월 이충무공이 노량전투에서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통절했던지 목숨이 거의 끊어지다 시피 했는데 함께 죽지 못한 것을 종신의 한으로 여겼다. 고향에 돌아와서는 문을 닫고 3년 동안 상을 마치었다. 선무원종훈에 참록되었으며, 광해조에 가선대부 동중추에 올랐다.

박의수

자는 미보요, 본관은 밀양이다. 좌의정 충숙공 익의 후손이요 참봉의 증손이다. 재주와 행실로 고을에서 칭송을 받았다. 임진란 때 적개장 변사정을 따라 적을 살해한 공이 많다.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박대기 3부자

자는 중용, 호는 녹야, 본관은 함양이다. 웅천군 신유의 후손이고 정언권의 손자이다. 대대로 시의를 익혔으며 성리학 공부에 몰두하였다. 임란 때 창의사 김천일과 함께 거의하여 공이 향방을 모집할 때 김공이 먼저 강화를 향해 출진하였다. 공은 마침내 제봉 고경명의 의진에 나아갔다. 금산 싸움에서 강진현감 신충일, 해남현감 변응정을 불러들이는 일로 격문을 가지고 공주에 갔다가 미처 돌아오지 못했을 때, 고공은 이미 전사한 뒤였다.

제문을 지어 제사를 올리고, 다시 복수장 고종후를 따라 종사하여 계원 장으로서 여러 고을에서 모병하였는데 미처 돌아오지 못한 때에 또 복수장 고공이 진주에서 순절하였다. 공은 혼자 살아남은 것을 한으로 생각하였다. 직장(直長) 벼슬이 내려졌으나 나가지 않았다. 손자 성오가 귀하게 된 연유로 참의를 증직받았다. 아들 장원은 군사를 거느리고 금산으로 가다가 길에서 죽었다. 둘째 아들 승원은 임진·정유란 때 창의하였고, 손자 성오는 갑자란과 병자란에 공을 세웠다.
 
박흡 

자는 여윤이요, 본관은 함양으로 응천군 신유의 후손이며 현감 성건의 증손이다. 형제 여섯 사람이 한 방에서 함께 살았으므로 호를 육우당이라 하였다. 임란 때 창의사 김공이 평소에 공의 지략이 있음을 알았으므로 함께 진주성으로 가자고 청하였다. 공이 즉시 달려가자고 하니 노복인 노락금이 적세가 매우 성한 것을 보고 말의 제갈을 붙들어 잡고 나아가지 못하게 하니 공이 노하여 꾸짖어 말하기를 “적을 보고 도망침은 열사가 아니다”라고 하고 칼로 왼쪽 팔을 쳤는데 노락금이 다시 오른손으로 붙잡으매 또 오른팔을 내리쳤다. 마침내 성에 들어가 김공과 같은 때에 전사하였다.

최희민

자는 경효, 호는 읍취당, 본관은 수성, 봉암 사위의 후손이고 승지 악궁의 아들이다.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 임진왜란 때 형 희급과 더불어 창의사 김공의 막하에서 병량미 운송에 끊어짐이 없게 하였는데, 진주성이 함락되어 형이 죽자 크게 통곡하였다. 집에 돌아와 은거하다가 죽었다.

문후소

자는 사빈이요, 본관은 남평, 판중추부사 호간공 효종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절의를 숭상하였다. 임진란 때 박승원과 함께 의병을 모아 고재봉의 막하에 나아갔다. 진산에 이르렀을 때 금산에서의 패전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왔다. 정유란 때 최길남 등 여러 사람과 함께 남원성 싸움에 참여하였다. 후일 주부를 제수받았다.

최개(崔摡)

자는 경원이요, 본관은 전주다. 소윤 득지의 후손이고 참봉계인의 아들이다. 하늘이 감동할 만한 효성이었다. 임진란 때 충의공 최경회가 격문을 보내 불렀으나 공은 부모님이 연로하셔서 가지 못하다가 아버지 참봉공이 함께 행동할 것을 권하자 공은 마침내 울며 이별하였다. 진에나아가자, 최공이 중히 여기며 의지하였다.

그러다가 성이 함락됨에 최공과 함께 죽었다. 그 일이 알려져 복호를 받았다. 두 아들 홍효와 홍제는 복수의 뜻을 품고 정유란 때에 이충무공의 막하에 나아가 참획한 바 매우 많았다. 이공이 포상을 청하는 계를 올려 봉사를 제수받았다.

곽기수

자는 미수, 호는 환벽당, 본관은 해미, 참봉 간의 손자이고 통정대부 세공의 아들이다. 효우가 독실하였으며 경적에 매우 밝았다. 선조 12년에 진사가 되었고, 1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무관 박사와 부안 현감을 지냈는데, 부모께서 연로함으로 돌아와 봉양하였다. 임진왜란 때 행재소에 달려가 가까이서 시종한 공로가 많았다.

정유란 때 의여를 모아 소의장 임환을 따라 예교 싸움에서 중요한 일을 맡았으며 적을 참획함이 매우 많았다. 적들이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해오지 못하였다. 임공(임환)이 이로써 더욱 무겁게 여기고 높이 평가함이 많았다. 난이 평정됨에 고향에 돌아가 성리학을 공부하였으며 문장과 덕행이 당세에 이름 높았다. 광해군 때를 만나 은둔하며 지내다 죽었다.

김덕흡(金德洽)

자는 자협, 본관은 김해, 좌찬성 인덕의 후손으로 정유란 때 전몽성이 거의할 때, 함께 일을 같이하고자 하니 어머니가 의진에 나아갈 것을 권유하였다. 마침내 전공과 함께 유리치를 나누어 지켰다. 때에 율사 최욱의 격문이 오매한 마음으로 적을 칠 것을 약속하였다. 유점동에 이르러 적을 많이 죽였으나 전공과 함께 죽었다. 호조 좌랑을 증직받았다.

최복남과 최길남 형제

자는 덕윤, 본관은 완산, 연촌 최덕지의 후손이며 산당충성의 증손이다. 어려서부터 도량이 넓었으며 부모님의 상에 모두 여묘를 하였다. 회옹이 공을 보고 더욱 공경하였다. 정유란 때 동생 길남과 아들 철과 함께 병량미를 모아 남원에 보냈다. 참봉 벼슬을 주었으나 받지 않았는데, 또 첨추를 제수받았다.
 
서건(徐鍵)

자는 선계, 본관은 이천으로 찰방 희서의 아들이다. 정유란 때 아버지 찰방공이 전몽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때, 공은 군무를 도와 유점동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만력 갑자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정묘란 때 군공으로, 군수 벼슬을 받았다. <계속>

박해현(초당대 겸임교수)·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장)

박해현·조복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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