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희 봉 학산면 계천길 문화유산해설사 전통건축해설사 영암군문화관광해설가

하드렛 날이란 2월 초하루이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농사가 시작되어 한 해의 농사를 시작하는 일꾼들을 위해 넉넉하게 상을 차려 대접하면서 하루 쉬도록 아래 사람들을 배려하는 날이기도 하다. 우리 고장에는 아직까지 하드렛 날을 이어오고 있는 전통마을이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 건너편에 있는 미암면의 대초지 마을이다. 대초지 마을에서는 오래전부터 하드렛 날 행사를 해 오고 있다. 동네의 형상은 배 모양이어서 중간에 집을 짓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해마다 하드렛 날에 당산제를 지낸다 한다. 뱃머리를 상징하는 동쪽의 당산나무에 먼저 당산제를 지내고, 배 모양의 앞 쪽(2/5)의 미리 세워 둔 돛대에서 제를 한 번 더 지내고 선미 쪽인 서쪽으로 가서 그 곳의 정자나무에 당산제를 지내고 뒤 쪽(4/5)의 미리 세워 둔 돛대에 역시 제를 한번 지낸다. 이렇게 4번의 제를 올리는 샘이다. 당산나무와 정자나무 아래에서의 제는 돼지머리를 놓고, 두 돛대에서 제를 올릴 때는 삶은 고기만 올린다. 온 동네사람들이 나와서 새끼줄을 길게 잡고는 사물놀이패가 풍악을 울리며 모두가 노래도 하며 동네를 돈다. 긴 겨울이 지나고 새로운 봄을 맞이하는 농사의 계절이 왔음을 알리고 모두가 같이 즐긴다.

들판에서는 콩을 볶아 먹고 칡을 캐 먹으며 한해의 건강을 기원하기도 했다 한다. 당산제가 끝나면 여자, 남자가 서로 편을 나누어서 줄다리기를 하는 데, 여자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제는 젊은 사람들이 없어서 많이 축소되어 전통이 사라질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대초지 마을은 2019년부터 전남문화재단의 후원으로 행사를 이어 나가고 있다. 하드렛 날에 내려오는 이야기로 “머슴들이 썩은 사내끼(새끼줄)를 가지고 산에 목매달러 올라간다.”는 말도 있다. 가짜 죽음을 통해 수명을 늘리고 싶은 의미일까? 이날은 콩을 볶아 먹기도 하고, 노래기를 쫓는 등 다양한 풍속이 행해진다. 바람을 관장하는 신(神)인 ‘영등 할머니’가 내려오는 날이라고 한다. 그 때문에 한 해 우순풍조(雨順風調)를 기원하면서 빨래를 하지 않는 등 행동거지를 조심했고, 좀생이별을 보아 날씨를 점치는 등 한 해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한 다양한 풍속이 행해졌다.

각 마을들의 정겨운 풍속들이 차차 퇴색되어  가고 있는 지금이다. 정겨운 마을들만의 풍속과 애환을 서로 공유하고, 그 시간의 흐름을 지켜보고 있던 곳이 정자가 아니었나 싶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이야기꽃이 피는 라디오 방송국이고 나그네들에게는 발걸음을 잠시 쉴 수 있는 휴식처인 곳이 정자가 아닌가 싶다. 어느 마을이나 길의 중간이나 끝에는 배려와 소통의 아이콘인 정자가 있고, 이야기들이 켜켜이 쌓여 녹아 있는 정자 문화가 있다.

우리 고장에 있는 정자를 찾아 떠나보자. 가장 먼저 찾아 갈 곳은 지난해에 보물 2054호로 지정된 영보정(永保亭)이다. 덕진면 영보리에 있는 조선 시대의 정자로 조선 초기 예문관 직제학을 지낸 최덕지(崔德之) 선생이 은퇴한 뒤, 지금의 영보촌(永保村)에 거주하면서 통례원 좌통례를 지낸 사위 신후경(愼後庚)과 함께 건립하였다. 15세기 중반에 창건되었으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며, 당시의 규모도 명확하지 않다. 선조 연간 이후 퇴락하였다가, 1630년경 최덕지의 7대손인 기정(棄井) 최정(崔珽)과 신천익(愼天翊)이 전주최씨·거창신씨(居昌愼氏)들과 함께 뜻을 모아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웠는데, 이때 현재의 규모로 완성되었다. 그 후 양 문족(門族)이 서로 협력하여 부분적으로 중수 또는 개수하여 한 말까지 이어왔다.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는 이곳에 영보학원을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항일구국정신을 배양시켰다. 영암지역 청년들의 항일투쟁 활동으로 꼽히는 1931년의 형제봉만세운동도 영보학원을 중심으로 졸업생과 청년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것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넓은 뜰이 잘 정리되어 있으며 전면에 영보정이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에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며, 네 귀에는 추녀를 찰주로 지붕의 무게를 분산하였으며 중앙의 3칸, 뒤쪽으로 측면 1칸에는 마루방을 꾸몄으며 그 외는 우물마루로 된 대청을 두었고 마루방 상부에는 2층의 다락이 가설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기단 위에 그랭이 기법을 이용한 막돌 초석과 회벽으로 막음 처리한 중앙에 조각된 특이한 화반이 1구씩 배치되었다. 또한 현판은 석봉(石峰) 한호(韓濩)의 친필이라고 전한다. 영보정은 신교육과 구국정신을 함양한 학사로서의 의미가 큰 유적으로, 지금도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옷날에 이곳에서 마을 축제인 풍향제(豊鄕祭)가 열린다.

회사정(會社亭)은 영암 구림대동계의 집회장소로서 1646년 박성오, 조행립, 현건 등이 세웠다. 구림대동계는 1565년에서 1580년 사이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동계(洞契)이다. 마을의 귀빈 영접장소이자 경축일 행사장으로도 이용되었으며 1914년 4월 박규상의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때 불타 주춧돌만 남았던 것을 1986년 복원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마루형 구조이다. 건물 왼쪽 한 켠에는 말에서 내려 말을 매어두었던 하마석이 있으며, 회사정 정면 바로 앞에는 풍기문란, 불효 등 마을의 규약을 어긴 이들을 묶어 놓았던 돌이 있다. 정자들 중 유일하게 단청을 한 건물로써 관청이나 사찰의 건물 외에는 단청을 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민간단체가 순수한 마음으로 마을 운영에 관한 일 외에는 다른 뜻이 없다는 주장이 받아 들여져서 단청을 허락 하였다고 한다.

그 밖에는 하정(夏亭) 유관(柳寬:1346∼1433)이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아들 유맹문(柳孟聞)에게 명하여 처음 지었다는 영팔정(詠八亭), 오한(五恨) 박성건(朴成乾:1418~1487)이 1479년(성종 10)에 관직에서 물러나 처의 고향인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 구림 마을에 정착하면서 세운 정자인 간죽정(間竹亭), 월출산을 바라보는 달맞이 정자로 관찰사김공병교영세불망비(觀察使金公炳喬永世不忘碑)의 철비(鐵碑)가 있는 원풍정(願豊亭), 청암 강한종(姜漢宗:1549~1622)이 교류 및 학문 연마를 위해 강진에서 영암으로 입향한 진주강씨 문중에서 1618년(광해군 10)에 건립한 부춘정(富春亭) 등등 많은 정자들이 영암에 있다. 영남엔 서원, 호남엔 정자라고 한다.

 이제 입춘을 지나 서서히 밭이나 논을 둘러보는 농민들이 늘어난다. 본격적인 농사철이 되기 전에 하드렛 날을 상기하면서, 잠시 숨을 돌려 우리 지역에 있는 정자도 한 번 둘러보고 면면히 이어져 온 배려와 소통의 따뜻한 온기를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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