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20>월출산과 관음신앙(中)

월출산과 서호 엄길리 매향암각명 옹관묘가 밀집 분포된 학산·시종 지역은 영산강 입구에 위치해 고대국가의 발전과 해로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월출산 일대에서 발달한 불교는 해양신앙과 연관이 깊다. 또한 서호 엄길리 ‘매향암각명’은 바로 상대포가 오랫동안 중요한 포구였음을 확인해줄 뿐 아니라 이곳을 중심으로 해양신앙이 형성돼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상대포·남해포는 고대 마한의 국제항

영암에는 ‘내비리국’과 ‘일난국’의 마한왕국이 있었다. 이 추론의 근거의 하나가 지석묘의 분포 밀집도였다. 다음 시기인 철기시대의 주 묘제인 옹관묘의 분포 밀집도 또한 국가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영암지역 지표조사 결과, 옹관묘 분포현황은 시종 60, 학산 25, 신북 6, 영암 5, 도포 3, 미암 1 개 등 모두 100개로 파악되고 있다.

옹관묘는 철기시대 영산강 유역에 집중된 묘제로 이 지역 정치체의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하다. 영암지역에 옹관묘가 시종면과 학산면 두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그곳을 중심으로 마한왕국이 발전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내동리 쌍무덤을 비롯하여 대형고분들이 수십기 밀집된 시종지역은 그곳이 마한왕국의 중심지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곳에 있는 남해포는 마한왕국의 주요관문 구실을 하였던 항구였다. 시종 지역보다 영산강 포구의 초입에 있는 학산지역은 외래문화를 받아들이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학산면에 옹관묘가 밀집된 까닭이라 하겠다. 학산면의 배후에 있는 상대포 지역이 보다 항구로서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어 점차 구림을 중심으로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여겨진다.

옹관묘가 밀집 분포된 학산·시종 지역이 모두 영산강 입구에 있다는 점은 고대국가의 발전과 해로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즉, 새로이 유입된 다양한 외래문물이 기존의 토착문화와 용해되면서 문화를 새롭게 발전시켰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제 구림지역의 상대포와 시종지역의 남해포가 문물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주요한 포구로 성장하였다. 영산강 유역의 마한 연맹체들은 이곳 항구를 중심으로 발전을 거듭하였을 것이다. 후세인들에게는 상대포가 영산강 유역의 중심항구로 기억되고 있다. 상대포를 사람들이 주목하게 된 것은 바로 조선후기 이중환이 저술한 ‘택리지’의 다음 기록이다.
 
“나주의 서남쪽이 영암군이고 월출산 밑에 위치하였다. 월출산은 한껏 깨끗하고 수려하여 화성이 하늘에 오르는 산세이다. 산 남쪽은 월남촌이고, 서쪽은 구림촌이다. (구림촌은) 아울러 신라 때 이름난 마을로써 지역이 서해와 맞닿는 곳에 있다. 신라에서 당나라로 조공 갈 때 모두 이 고을 바닷가에서 배로 떠났다. 바닷길을 하루 가면 흑산도에 이르고, 흑산도에서 또 하루 가면 홍의도에 이른다. 다시 하루를 가면 가거도에 이르며, 간방(艮方)의 바람(동북풍)을 만나면 3일이면 중국 영파부 정해현에 도착하게 되는데, 실제로 순풍을 만나기만 하면 하루 만에 도착할 수도 있다. 남송이 고려와 통행할 때 정해현 바닷가에서 배를 출발시켜 7일 만에 고려 경계에 이르고 뭍에 올랐다는 것이 바로 이 지역이다. 당나라 때 신라 사람이 바다를 건너서 당나라에 들어간 것이 지금 통진 건널목에 배가 잇닿아 있는 것 같았다. 그 당시에 최치원, 김가기, 최승우는 장삿배를 편승하고 당나라에 들어가 당나라의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 내용은 본란에서도 여러 차례 소개될 정도로 구림 상대포가 통일신라 당시 대표적인 국제항이었음을 확인해주고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곳을 통해 최치원을 비롯한 당대의 지식인들이 출입하였음을 보여준다. 당으로 가는 사신들이 빈번히 왕래한 곳이었고, 수시로 상선이 닿았던 국제적 포구였다. 통일신라 시대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이르는 길 중 영암 구림(덕진)의 영산강에서 흑산도를 거쳐 양주ㆍ명주로 연결되는 길이 제1의 항로였다. 이는 역사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다. 상대포 일대가 국제 항구였다는 것은 인근의 엄길리 매향비와 구림도기 유적지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남해포 또한 상대포와 같은 국제 무역항이었다. 남해포는 불과 얼마 전까지도 주요한 항구기능을 하고 있었으며, 특히 고려 초에 이미 국가에서 운영하는 해신 사전(祀典)을 통해 그곳에 중요한 포구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상대포 보다 남해포가 마한 시기에는 교역 규모가 큰 항구였으리라 생각된다. 남해포가 내비리국의 주된 항구기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양신앙이 형성된 남해포와 상대포

이처럼 포구가 있는 곳에는 해양신앙이 형성되어 있었다. 포구에 사는 주민, 포구를 이용하는 선박들이 그들의 해양활동의 위험요소를 극복하고 항해의 안전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하여 신앙을 믿어왔으며 그 믿음의 형태는 다양하게 나타났다. 남해포에 세워진 남해신사는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해양제사 의식을 주관하는 사당이었다. 기록상으로는 고려 초에 확인되고 있지만 이미 마한시대부터 있었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이러한 해양신앙은 중국에서는 ‘마조’라는 여신을 토착 해양신으로 여기면서 불교의 관음보살을 또 다른 해양신앙으로 모셨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말(馬)이나 새(鳥)를 통하여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였다. 월출산에서 확인된 철마신앙은 바로 이러한 해양신앙의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매향은 불교와 연결된 해양신앙의 형태라 할 수 있다. 서호 엄길리 매향암각명은 바로 상대포가 오랫동안 중요한 포구였음을 확인하여줄 뿐 아니라 이곳을 중심으로 해양신앙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곧 상대포를 중심으로 불교와 관련된 해양신앙이 형성되어 있었다. 지금도 월출산에는 도갑사를 비롯하여 몇몇 사찰들이 있지만, 곳곳에 절터, 불상, 불탑, 부도 등 많은 불교유적이 확인되고 있어 이곳을 중심으로 불교가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미 366년 마한시대에 마라난타가 이곳 영산강을 통해 입국하여 포교한데서 알 수 있듯이, 월출산 일대에서 불교가 성행한 것은 당연하다.
 
해양신앙과 관련된 월출산의 불교

월출산 일대에서 발달한 불교의 성격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지난 호에 언급한 마라난타전에 삼한의 뾰족한 산꼭대기에 관음보살이 머무는 궁전이 있고, 그 산이 곧 월악(月岳)이라고 한 고승전 기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월악이 월출산임은 월악이라는 명칭과 함께 마라난타가 영산강 일대에서 포교하였고, 뾰쪽한 산꼭대기라고 형세를 설명하고 있는 데서 분명해 보인다. 불교가 처음 유입되었을 때 월출산이 신앙의 중심지였음을 말해준다. 월출산이 관음보살 궁전이라고 하는 것은 관음신앙이 주로 신앙되었음을 알려준다.

월출산이 관음신앙의 주요한 신앙장소였다고 하는 것은 백제 승려 혜현(惠現)의 행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여담이지만, 필자가 처음 고대사를 공부하게 된 계기도 ‘혜현의 불교사상’을 대학원 첫 학기 리포트 주제로 삼으면서였다. 자유 주제였는데 필자와 이름이 비슷하여 고른 것이었다. 이것이 필자가 고대사, 그리고 영암지역 마한사를 다루는 인연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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