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18>우리나라 최초의 차(茶) 전래지 불회사(下)

전남은 지역에서 생산된 자생찻잎을 이용해 찻잎을 엽전 모양으로 만들어 끓는 물에다 우려 마시는 고유한 차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마한시대부터 지역의 전통으로 굳어져 내려온 것이다. 사진은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 봉수산 자락에 있는 초의선사 유적지와 엽전차.

지난 호에 나주 불회사 일대가 우리나라 차 시배지라고 추측하였다. AD366년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래하기 위해 마한 땅에 들어왔을 때 전래되었을 것이라고 살폈다. 오늘은 이 문제를 조금 더 상세히 살피고자 한다.

차(茶)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주장

우리나라에 차(茶)의 기원에 대해 여러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한반도 자생설> 차나무가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 자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차나무의 생장이 적합한 화강암 지대라는 사실을 근거로 들고 있다. 중국 문헌에 파촉(巴蜀) 지역에서 바치는 공물에 찻잎이 들어 있다는 점도 예로 들고 있다. 기원전 12세기 무렵인데, 파촉지방은 황해를 중심으로 한반도, 만주, 요동, 요서, 산동, 오월을 포함한다. 차 씨가 새나, 배, 해류의 영향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중국과 가까운 마한 땅에는 기원전 훨씬 이전부터 차나무가 자생하여 약용으로 쓰이다가 음료로 마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차 씨가 10월, 11월 무렵 열리는데 만약 이때 발생한 태풍이 중국을 거쳐 강한 서북 계절풍으로 바뀐다면 차 씨가 옮겨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최치원은 선인이 단차(丹茶)를 약으로 먹으면 신선이 된다는 얘기가 고조선 때부터 전해 내려왔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에 차가 자생하였다는 주장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다만, 이 주장은 자생차가 불회사 인근에 집중되어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고구려 전래설> 1940년대 발굴된 안악 3호분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찻잔 형태의 잔을 탁(托)에 받쳐 들고 있는 여인상이 있다. 이로 보아 고구려도 일찍부터 차가 유입되었다는 것이다. 고구려에 차가 들어온 것은 역시 불교 유입과 관련이 있다. 372년 전진의 승려 순도가 불교를 전파할 때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 전래설의 근거이다. 고구려가 위치한 국내성 일대는 차를 재배하기에는 기온이 낮다. 고구려의 차는 재배하지 않고 수입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가야 전래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와 있는 허황후가 인도에서 건너올 때 차가 전래되었다는 주장이다. 유명한 불교학자 이능화가 “김해의 백월산에는 죽로차가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수로왕비 허씨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 종자라 한다.”라고 하였고, 김해의 백월산에는 지금도 길이 15cm가 넘는 대엽종 찻잎이 자라고 있으며, 김해 근방에는 차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마을 이름이 많이 남아 있는 것도 주장의 주된 근거이다. 백월산 남동쪽 다호리(茶戶里), 진례면의 찻골(茶洞)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보면 김해지역에 차가 일찍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이 주장은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어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신라 전래설> 앞서 언급하였듯이, 흥덕왕이 차를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는 삼국사기 기록에 따라 통설화되었다. 그러나 그 기록에 차가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다고 하였으므로 오히려 647년 이전에 차나무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물론 이때 어느 곳에 차가 심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설총이 신문왕에게 올린 화왕계에서 “임금께서는 좋은 고기와 곡식으로 배를 부르게 하나 차와 술로써 정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당시 왕에게 술과 더불어 차가 일상의 기호 음료임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차 시배지와 관련하여 화엄사 창건주인 연기법사가 차 종자를 가져왔다는 주장이 있다. 즉 그곳이 장죽전(長竹田)이며 최초의 시배지라는 것이다. 중국에서 화엄학을 공부하고 돌아오면서 차 종자를 가져왔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선덕여왕 때 이미 차가 들어와 있는 것으로 볼 때 장죽전이 최초의 시배지라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마한 땅에 불교를 전파한 마라난타

마한 땅에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래할 때 차가 유입되었다는 지난 번의 주장으로 돌아가 보자. 영산강 내해는 일종의 지중해로 당시 국제무역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중국, 일본, 신라, 가야, 심지어 동남아시아 여러나라 상인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활발한 무역을 하고 있었다. 특히 영산강 유역은 북방문화와 남방 해양문화가 교류하는 문화의 융합지역이었다. 이미 3세기 말 신미국과 20여 마한 남부연맹 왕국은 진에 조공하였다는 중국 기록이 있다. 진을 이은 나라가 동진이다. 포교를 위해 동진에 들른 마라난타가 포교 대상으로 마한에 들른 것은 자연스럽다. 해동고승전 ‘마라난타’조에 잘 나와 있다.

“대저 삼한이란 마한·변한·진한이 그것이다. 동북쪽에 진단이란 나라가 있었는데 혹은 지나(支那)라 하기도 하고, 여기서는 다사유라고 하는 바, 이 나라 사람들은 생각을 많이 하는 까닭이며, 곧 대당국을 가리킨다고 하였다.(중략) 이곳 성주에 대해서는 쉽게 모든 것을 적을 수는 없지만, 백제는 곧 마한을 이름임은 분명하다.”

백제를 마한이라 함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마라난타가 백제에 들어와 포교활동을 하였다고 하는 삼국사기 기록은 마한지역에서의 그것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남평 덕룡산 불호사 곧 불회사 중건 상량문에 마라난타가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하는 것이나, 담양 법운산 옥천사 사적에 마라난타가 동진으로부터 도래한 곳이 곧 마한 땅이었다고 하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마한 고유의 제다문화가 형성되었다

마라난타가 불회사를 창건했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과 다도면 덕룡산 자락에서 자라는 야생차 나무가 마라난타가 불회사를 창건하고 차를 심었다는 전승이 일치하고 있다. 그것도 불회사 근처에 많이 자라고 있는 것은 이를 믿어도 될 근거가 된다. 그러니까 불회사의 차 나무는 마한 시대부터 있어 온 것이다. 불과 1950년까지만 해도 불회사, 강진, 장흥, 해남 지역에서는 제다법에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찻잎을 떡처럼 찧어 엽전 모양으로 만든 일종의 덩이차가 일반적이었다. 전남은 지역에서 생산된 자생찻잎을 이용해 찻잎을 엽전 모양으로 만들어 끓는 물에다 우려 마시는 고유한 차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마한시대부터 이 지역의 전통으로 굳어져 내려온 것이라 생각된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다소’(茶所)에서 차가 사찰이나 서원, 양반, 일반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약용이나 음용으로 이용되었다. 다소가 있었던 곳이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장흥도호부 13개소, 무장현 2개소, 동복현 1개소 등 16개소가 있었다 한다. ‘다소’가 주로 장흥도호부 관할 하에 있었다는 것은 영산강 유역이 일찍부터 차 재배지라고 하는 사실을 입증해준다. 면 단위 이름에 다(茶)자가 들어간 다도면도 우리나라의 유일한 행정구역이라고 하는데, 원래 남평군 다소면에서 유래하였다. 이곳이 차의 주산지임을 말해준다.

조선후기 대표적인 다인(茶人) 초의선사가 출가한 운흥사는 불회사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이곳에도 야생 차나무가 자라고 있다. 초의선사가 다인이 된 것도 그곳에 오래전부터 자라고 있는 야생차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일제 강점기에 조사된 자료를 보더라도 불회사에서는 여전히 옆전차를 제다하고 있었고, 옆전차를 제다하는 기록이 자세히 조사된 곳은 불회사가 유일하였다 한다. 나주 불회사가 덕룡산에서 자라는 자생차로 옆전차를 만드는 마한 이래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켜왔음을 말해준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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