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의병사(7) - ■임진왜란과 영암의병
게릴라전으로 많은 전과 올렸지만 의병 희생자도 많아

원균의 칠천량 해전 패전

김응서는 급히 도원수 권율에게 알렸다. 권율은 원균에게 가토 기요마사의 후속 부대를 치라고 하였다. 한 도(道)의 방위를 책임지는 군사령관이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도원수가 일개 첩자의 수중에서 농락당하였다. 도원수 권율의 출격명령을 받은 원균은 난감하였다. 출격하자니 왜적의 속임수에 빠지는 것이라고 의심이 되고, 출격하지 않고 있다가 이순신처럼 당하지나 않을까 여러 날 고민 끝에 마침내 출격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거제도를 지나 절영도에 이르렀을 때 함대 앞에 몇 척의 왜선이 나타났다. 긴장한 원균은 왜선을 격파할 목적으로 군사를 독려하여 추격하였다. 왜선은 덤비는 척하다가 갑자기 항로를 바꾸어 도망을 쳤다. 이 일이 되풀이되면서 원균의 함대는 불식 간에 외양으로 유인당하였다.

파도는 더욱 거칠어지고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왜선은 자취를 감추고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제서야 원균은 왜적에게 유인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병사들에게 뱃머리를 돌리라고 명령하였다. 원균의 수군은 한산도로부터 잠시도 쉬지 않고 바다 멀리 왜적을 추적하다가 밤늦게야 가덕도에 닿았다. 여기에 상륙한 원균의 군은 미리 매복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군에게 400명이나 전사당하고 나머지 군사는 황급히 배를 타고 바다 가운데로 빠져나가 거제 칠천량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에 왜적의 수군이 대거 몰려와서 원균의 수군이 정박하고 있는 거제도 칠천량을 둘러싸고 대대적인 화공(火攻)을 감행했다. 이때 각종 전함은 모두 불타고 통제사 원균은 죽고 전라우수사 이억기도 전사하였다. 출구 쪽에 있던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전함 일부를 이끌고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였다. 이것이 정유년 즉 1597년 7월 15일의 일이었다.

이순신, 수군통제사로 부활

이렇게 하여 원균의 3도 수군은 완전히 함몰되었다. 조선에는 수군이 없는 것과 같게 되었다. 이 패보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8월 3일이었다. 바로 이날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은 지리멸렬된 수군의 통제사로 부활되었다.

일본 수군은 남해와 황해를 돌아 물자를 조달하면서 육군과 합세하기 위하여 경상도 해안을 약탈하면서 전라도 해안을 향하여 접근해 왔다.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북쪽으로 진격하고 있을 때 초전에는 원균에 의한 해전이 대패했다. 그러나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수군이 해상에서 일본 수군을 연전 연파하고 있었다. 옥포에서 승리를 거둔 후 당포·당항포·부산포·한산도 등의 싸움에서 승리하였다. 이로써 일본군은 해상 수송로가 봉쇄되어 서해로 군수물자를 옮기려던 일본의 계획이 무산되고, 또한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역이 일본군의 피해를 입지 않게 되어 이후 전쟁의 전개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전라도 해안경비를 책임 맡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나대용을 중심으로 거북선을 만들며 전함과 무기를 정비하고 수군을 훈련을 시키며, 군량미를 저장해두는 등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자 80여 척의 배를 거느리고 옥포에서 첫 승리를 하였다. 전라우수영(해남)과 경상우수영의 함선이 합세하여 사천·당포·당황포·한산도 등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와 같은 승리로 우리 수군은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고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지킬 수 있게 되어 왜군의 작전을 좌절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와 같은 승전에는 전라도 수군과 백성들의 힘이 컸다.

조선에 투항한 왜군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투항한 일본장수 사야가는 히데요시의 명분 없는 침략 야욕에 굴하지 않고 자기의 소신대로 행동한 인물이다. 1592년 4월 조선 침략을 위해 출병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부산에 상륙하였다. 사야가는 바로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선봉장이었다. 사야가는 부산 상륙 후 경상도 좌병사 박진에게 강화서를 보내 투항 의지를 밝혔다. 조선군에 투항한 사야가는 곧바로 경상도 의병들과 힘을 합쳐 동래·양산·기장 등지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고 한 달 동안 여덟 차례나 승전보를 올리는 개가를 이루었다. 조정에서는 김해 김씨라는 성과 충선(忠善)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달성군 가장면 우록동에 정착하도록 하였다. 사야가의 후손은 현재 300명이 된다. 이외에도 왜군으로 우리에게 투항하여 왜군과 싸운 사례들이 있다.

일본에서도 사야가에 대한 관심이 아주 높았다. 일본의 문호 시바 료타로가 쓴 ‘한나라 기행’은 사야가를 소재로 한 기행집이다. 이 기행집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귀화한 왜군이었다는 사실을 일본인에게 처음 알리는 책이다. 소설에서도 시야가가 등장한다. 하세가와 쓰토무가 쓴 ‘귀화한 침략병’, 고사가 지로의 소설 ‘바다의 가야금’ 등 현재 일본에는 사야가를 다룬 몇 권의 역사소설이 출간되어 있다. 책을 통해 일본인들은 조선에 투항한 왜장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방송 역시 사야가에 관심을 가졌다.

1992년 임진왜란 400주년을 맞아 NHK ‘역사발견’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사야가에 관한 다큐멘타리 ‘조선출병 400주년’ ‘히데요시에게 반역한 일본무장’을 제작 방송했다. 사야가란 누구인가, 왜 조국 일본을 버리고 조선을 선택했는가에 대해 추론하고 증명한 프로그램이다. 이 다큐멘타리는 일본 전역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이후 다른 방송과 신문들도 사야가를 조명하기 시작했다. 2002년 11월 2일, 요코하마에서는 사야가를 연구하는 심포지엄이 열렸다. 현재는 25명으로 구성된 연구모임이 있다.

임진왜란에 참여한 영암의병

전몽성 신도비

영암은 지리적으로 남해안과 서해안을 접하고 있어 주로 향병을 중심으로 향읍 방위전에 주력하고 있었다. 특히 정유재란을 전후한 시기에 전라도 의병은 대체로 해안이나 하천 혹은 산간의 요충지를 이용한 게릴라전을 많이 펼쳤다. 이러한 게릴라전으로 많은 전과를 올렸지만 의병들의 희생자도 많았다.

명랑해전을 전후한 시기에 전몽성·유장춘 의병 등은 수군과 협력하여 명랑 인근의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왜구와 치열한 전투를 하였다. 전몽성은 동생 몽진과 첨사 유장춘 등 여러 사람과 함께 창의하여 율치(栗峙)에서 적 수백 명을 참살하고, 다시 월출산으로 진을 옮겨 해암포에 몰려있는 적선 수십 척을 유점동(鍮店洞)에서 격퇴하였으나 이튿날 적이 전 병력으로 공격해왔다. 이에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 속에서 나무를 의지하고 적과 싸우다가 활시위가 끊어지고 화살이 다 떨어지자 칼을 빼 들고 적진으로 돌격하여 적 칠십 명을 죽이고 동생 몽진과 함께 순절하였다.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한 영암 의병들은 영암 향민들로 유능한 장수의 휘하에서 결집된 전력으로 자발적으로 왜적 토벌에 참여하였다.     <계속>

박해현(초당대 겸임교수)·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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