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17>우리나라 최초의 차(茶) 전래지 불회사(上 )

지난주 인천이 고향인 서울의 모 전문직능단체의 간부가 필자를 수소문하여 연락을 해왔다.  자신이 속한 단체에서 마한의 역사를 알고 싶다는 것이다. 필자는 한반도의 뿌리는 마한에서 비롯되고 그 마한의 중심지가 나주 반남과 영암 시종임을 설명하며, 이곳에서 우리 민족의 찬란한 역사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안내하였다. 그리고 필요하면 필자가 길 안내를 해주겠다고 하며 관련 자료를 보내주었다.

작년 11월 초 필자가 재직한 초당대 학생들에게 마한의 역사를 알게 하고자 일부러 영산강 유역의 마한유적 답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학생들과 다녀왔다. 그때 필자는 ‘나주반남-국립나주박물관-시종 마한역사문화공원-남해신사-내동리 쌍무덤-월출산기찬랜드-왕인박사유적지’로 이어지는 답사길을 만들어 학생들을 안내하였다. 우리가 찾는 답사길은 고대 마한의 심장부, 즉 ‘영산르네상스 마한실크로드’인 셈이다. 영암 주민이건, 나주 주민이건 이 길을 걸으며 우리 지역의 정체성을 찾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차제에 나주시나 영암군에서 고향방문 행사를 기획하여 이 길을 순례하게 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산티아고 가는 길’처럼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차(茶)가 처음 심어진 때는 언제고, 어디일까? 이것에 대한 논란이 종종 일어난다. 중국은 당나라 때 육우(733~803)가 저술한 ‘다경(茶經)’의 기록을 근거로 차의 기원을 중국의 기원과 함께 신화 속의 염제신농씨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주장하고 있다. 일본은 나라시대에 견당사를 통해 당에서 차가 전래되어 729년 천황이 ‘인다’(引茶: 반야경을 강독하는 데 법회를 연 다음 날 승려들에게 답례품으로 하사하는 의식)를 하였다고 하여 그 이전에 차가 들어와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대렴의 차 전래설은 잘못된 것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사기’ 기록을 근거로 흥덕왕 때인 828년 무렵, 처음 차가 중국으로부터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다. 아마 독자들은 학창시절 그렇게 배웠을 것이다. 즉 “828년 겨울 12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조공하니 문종이 인덕전으로 불러들여 잔치를 베푸는 데 차등이 있었다. 당 사신으로 간 대렴이 차 종자를 가지고 돌아오니 흥덕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632~647) 때부터 있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성행하였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만을 가지고 살핀다고 하더라도 차는 선덕여왕 때부터 이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적어도 647년 이전에 차나무나 음료로서의 차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미 7세기 이전에 우리나라에 음다(飮茶) 풍속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828년에 김대렴이 중국에서 차 종자를 가져온 것이 우리나라에 최초로 차나무가 전파되는 계기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겠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언제 어디에서 처음 차나무가 심어졌을까?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설화가 하나 전하고 있다. 우리 고장 나주시 다도면 덕룡산 자락에서 자라는 야생차나무는 우리나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366년 불회사를 창건할 때 이곳에 심었다는 얘기가 전승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 불회사의 차의 역사는 선덕여왕 때보다 적어도 166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가장 오래된 차 시배지가 되는 셈이다.

나주 불회사 일대는 자생차 분포지

필자는 꽤 오래전에 본란을 통하여 마라난타가 384년에 백제 침류왕 때 백제 수도 한성에 들어와 불교를 전파하였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바 있다. 즉, 384년은 마라난타가 백제의 수도 한성에 들어온 해이고 마라난타는 그보다 훨씬 빠른 적어도 367년 이전에 나주 불회사에 주석하였다고 하는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곧 불교 초전은 백제가 아닌 마한 시기이고 최초 도래지도 불회사임을 밝혔다.

백제의 불교는 마한지역의 불회사에서 영광 불갑사를 경유하여 백제 수도 한성으로 들어갔음을 밝혔던 것이다. 불갑사 역시 마라난타가 초조(初祖)로 나오고 있다. 불회사와 불갑사는 약간의 시기의 선후 차이는 있지만 모두 마라난타가 초창하였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점은 이들 사찰이 어떤 형태로든지 마라난타와 관련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사찰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조선사찰사료’를 보더라도 백제 최초의 절이 영광 불갑사와 나주 불회사임을 밝히고 있다. ‘조선사찰사료’에서는 백제라 하였지만, 이 무렵의 영광이나 나주지역은 마한의 영역이었다.

특히 나주는 마한의 심장부였다. 당연히 백제가 마한으로 이해하며 읽어야 한다.

그런데 두 사찰에는 모두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어 주목된다. 연구자들은 우리나라에 들어와 유구한 세월동안 우리 민족에 의해 한반도에서 우리 풍토에 맞게 가꾸어지고 뿌리내리게 되었으므로 ‘자생차’라 부른다. 이 자생차가 불회사에는 무려 50정보나 자생하고 있다. 사찰 측에서는 약 1천700여 년 전부터 차를 재배하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마라난타가 불회사를 창건했을 때부터 이미 차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사찰 측의 기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구전 전승이 내려오고 있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영산 지중해를 중심으로 연맹왕국을 발전시킨 마한은 일찍부터 중국, 일본, 동남아 여러 나라와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 특히 3세기 말 마한의 20여 연맹왕국의 사신들이 중국을 방문한 사실을 통해 마한과 중국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의 차 문화가 일찍 우리나라에 전파되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거기다 마한은 온난한 남쪽에 위치하여 차나무가 자랄 수 있는 생육조건을 잘 갖추고 있었다. 우리나라 차 분포 지역이 대부분 당시 마한 땅이라는 것은 마한에서 차가 시작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찾을 수 있다. 일본의 ‘동대사요록’에는 백제 승려 행기(行基)가 일본의 동대사에 차나무를 심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행기 스님에 대해서는 본란에서 다루기도 하였지만, 우리가 잘 알다시피 왕인박사의 후손으로 일본 대중불교의 화신이라고 불리고 있다.

특히 그는 당시 일본불교의 최고 책임자가 되어 일본에 있는 동대사의 대불(大佛)을 조영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하였다. 왕인박사는 우리 지역 영암출신 마한인이다. 따라서 행기 스님은 마한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본다. 행기 스님이 동대사에 차를 심었다면, 그 차는 아무래도 옛 마한 땅에서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마라난타가 마한으로 차 종자 가져와

원래 차 문화는 인도와 중국에서 발달하였다. 마라난타가 포교를 위해 동진을 방문하였는데 동진(東晋)에는 차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은 여러 기록에서 확인되고 있다. 인도나 중국에서 2천 년, 3천 년에도 사막이나 열대지방, 특히 유목생활을 하던 종족에게는 채소 구실을 하던 차가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식품이었다. 당시의 인도나 중국에서는 차를 약용과 식용의 어떤 형태로든 이용하고 있었다.

차는 약리 효능이 아주 오래전부터 알려졌고 그것이 차를 마시는 이유의 하나였다. 동진을 거쳐 마한 땅까지 포교를 위해 수만리 길을 나서는 마라난타에게 차는 상비약과 비상식량이 되었다. 따라서 마라난타가 마한 땅에 들어설 때 차 종자를 가져왔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위에서 언급하였지만, 현재 나주의 야생차밭을 살펴보면 영산강을 따라 덕룡산과 금성산, 즉 불회사를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추정의 근거가 된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