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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비리국은 반남·시종의 정치세력이 세운 마한의 대국■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16>내비리국(內卑離國)과 자미산성(下)
자미산성에서 바라본 월출산 자미산성을 왕궁으로 둔 내비리국은 풍부한 농업 생산력을 기반으로 활발한 대외교역을 통해 거대한 마한왕국을 건설했다. 동신대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개원’(開元)이라는 명문화폐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사진은 자미산성에서 바라본 월출산(사진 왼쪽)과 자미산 아래의 대안리 고분 모습.

반내부는 내비리국에서 파생

‘반내부리’라는 명칭이 백제시대 나주지역을 대표하는 행정구역 명칭이 분명하다. 이를 토대로 ‘반내부’라는 명문 기와가 출토된 자미산성은 어쩌면 백제 이전 마한의 중심지일 가능성까지 추론하여 보았다. 이제 반내부 명칭을 가지고 이곳에 있었던 마한왕국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유추하여 보도록 하겠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필자는 이 지역에 있었던 마한 연맹왕국은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마한 54국의 하나인 내비리국(內卑離國)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남선은 언어학적으로 내비리국의 ‘비리’(卑離)는 벌판을 뜻하는 ‘벌(伐)=부리(夫里)=평야’의 뜻이 있다고 하였다.

이 견해는 비교적 설득력 있게 받아들이는 데 ‘내(內)’는 ‘내 천(川)’의 의미이므로 ‘내비리국’은 ‘냇가가 있는 평야에 있는 나라’라는 뜻이 된다. 이 명칭은 자미산성 및 반남 고분군이 있는 반남평야가 큰 내(川)인 삼포천를 비롯하여 작은 하천들이 많이 분포된 사실과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내비리국은 반남·시종 지역의 정치세력이 연합하여 세운 마한의 대국이었다. 1917년 발굴된 신촌리 9호분의 금동관과 2019년 7월 새롭게 확인된 영암 시종 내동리 쌍무덤 출토 금동관편이 동형(同型)이라는 사실은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영산강 유역 대국 내비리국은 해남반도에 있는 침미다례와 함께 마한남부 연맹체의 핵심 왕국이었다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내비리국은 시종·반남의 연맹왕국

그러면 ‘내비리국’ 명칭이 ‘반내(나)부리’라 하여 접두어 격인 ‘반(半)’이 첨가되었을까? 그것은 백제와 마한이 6세기 중엽 통합될 때 마한 연맹왕국의 종주국을 자처한 내비리국이 끝까지 통합에 부정적인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반남지역이 다른 영산강 유역의 마한 왕국보다 훨씬 더 강력한 토착성을 견지하고 있음은 옹관고분 중심의 영산강 유역에 석실분이 새롭게 들어올 때 이를 거부하고 옹관고분을 끝까지 고집하고 있는 데서 충분히 알 수 있다.

따라서 백제 및 백제와 통합을 추진한 마한 연맹체는 반남지역에 있는 내비리국 왕국 세력을 견제하려 했다고 본다. 내비리국과 인접한 나주에 반나부리현 보다 규모가 큰 ‘발라군’을 별도로 설치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더구나 내비리국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반쪽 낸다’는 의미를 담은 정치적 명칭으로 접두어 ‘半’자를 넣고, ‘현’으로 격하시킨 행정구역을 편성하였다고 본다.
 
내비리국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한 ‘半’

이러한 사례는 섬진강 유역을 장악하려는 백제에 끝까지 대립했던 대가라(大加羅)를 백제가 ‘반파’(伴跛 혹은 叛波)라고 비하하여 불렀다는 점을 고려하면 가능한 추론이다. 이를테면 침미다례를 ‘남만’이라 하여 애써 무시하였던 백제가 역시 영산강 유역에서 독자적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며 끝까지 백제 중심의 연맹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내비리국을 약화하고자 반쪽 낼 ‘半’ 자를 붙인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역으로 내비리국 왕국의 정치적 힘이 실제 강성했음을 말해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생각한다. 반남·시종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수십 여기의 거대한 고분군의 존재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후세에 알려주고 있다고 믿어진다.

자미산성을 왕궁으로 둔 내비리국은 풍부한 농업 생산력을 기반으로 활발한 대외교역을 통해 거대한 마한왕국을 건설하였다. 동신대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하는 과정에서 출토된 ‘개원’(開元) 명문 화폐는 이를 잘 말해준다. 개원통보는 중국 당나라의 대표적인 청동화폐로, 621년 처음 발행되었다. 자미산성에 출토된 ‘개원통보’를 동신대 발굴 보고서에서는 고려 시대에 이르러 ‘개원통보’를 모방하여 제작된 것으로 보았으나, 이미 같은 시기의 부여 궁남지, 부소산성 등지에서 ‘개원통보’가 나온 것으로 볼 때 자미산성 출토 ‘개원통보’도 이미 백제 시기에 당에서 들어온 것임이 분명하다. 당 화폐가 자미산성에서 출토된 것은 내비리국이 백제에 통합된 후에도 여전히 영산 지중해 교역의 중심지로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자미산성은 역사적 격변기의 중심지

이렇게 자미산성이 지리적·역사적으로 영산 지중해의 거점지역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역사적 격변기마다 그 지역을 차지하려는 치열한 격전지가 되어갔다. 자미산성과 관련하여 후삼국 쟁패전에서 견훤과 왕건의 쟁패지라는 설화가 전승되고, 고려후기 삼별초 항전의 거점지역이라는 얘기도 전하고 있다.

견훤은 전주, 영광, 함평 쪽에서 왕건과 연결되어 있는 나주를 포위 공격하려 하였다. 이때 견훤의 거점지역이 자미산성이었다. 동신대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바에 의하면, 현재 확인되는 자미산성 성벽은 기저부에 2열의 석심을 두고 그 외부에 흙을 성토한 토축성이나 수구가 위치한 곳에는 협축법으로 조성하였으며, 산사면의 심한 경사도로 인해 부분적으로 외벽 쪽에 1개의 단을 둔 유단 형식을 보였다. 이러한 유구 양상은 대체로 조악한 편이어서 짧은 시간에 축성되었음을 알려준다. 왕건 군대와 싸우기 위해 견훤 군대가 자미산성에 주둔한 것이 단기간이었음을 알려준다. 이는 견훤 세력이 후백제 건국 초기부터 자미산성이 속한 반남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함을 말해준다. 그렇다고 반남지역이 왕건에게 바로 귀부한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나주지역의 향배와 비교하면 쉽게 이해된다. 

나주는 왕건에게 처음부터 바로 귀부하였고 견훤의 압력을 끝까지 이겨내며 왕건의 세력 근거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다 보니 서로 인접한 지역이기는 하나 나주와 반남 지역이 지니는 정치적 대우는 너무나 차이가 컸다. 나주는 태조 왕건이 건국 초기부터 ‘나주도행대 시중’으로 삼아 우대한 것에 비해, 반남은 통일신라 시대에 ‘발라군과’과 동격이었던 ‘반남군’이 반남현으로 격하되었던 것이다.
 
역사의 패자와 운명을 함께 한 자미산성

반남의 이러한 슬픈 역사는 삼별초 군대가 자미산성을 근거 삼아 나주 금성산성의 여·몽 연합군과 맞서 싸울 때도 이어졌다. 즉 반남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패배한 세력의 거점이 되다 보니 승자에 속한 금성산성이 역사적으로 사전(祀典)에 포함되는 등 제대로 평가받을 때 자미산성은 철저히 소외되어 전설의 주인공으로만 남아 있게 되었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박해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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