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의병사(6)-■임진왜란과 영암의병

정여립 사건으로 본 호남민심

조선시대 최대의 사옥(史獄)의 하나로 피바람을 일으킨 정여립 사건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589년이었다. 이 사건은 “역모인가, 조작인가? 조선 최대의 정치 미스터리, 정여립의 난”이라고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당시 호남을 대표할 수 있는 이발, 정개청과 같은 유학자를 비롯해 호남사림 1천여 명이 죽었다. 기축사옥으로 인해 당시 호남인들은 조정에 대한 반감과 불신이 팽배했다. 그렇지만 3년 후 일어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호국정신을 발휘하여, ‘若無 湖南이면 是無國家’라고 할 정도로, 의병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정여립 사건을 주도한 인물이 정철이다. 정철은 서울에서 출생했지만, 담양에서 청년기를 보내면서 기대승이며 김인후 같은 대학자들의 문하생이었고 27세에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다.

선조 22년 10월 황해감사가 올린 비밀장계 한 장이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정철은 그날 아들의 장례를 치르다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선조임금과 독대하고 나서 정여립 사건을 역모사건으로 다루었다. 대동사상의 실현을 꿈꾸던 사람 정여립은 전주에서 명문으로 꼽히는 동래 정씨 가문에서 태어나 22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학유, 예조좌랑 홍문관 수찬 등을 지냈다. 실록에 의하면 자신을 조정에 천거한 이이를 비판한 것이 선조의 노여움을 사 관복을 벗게 되고 이후 벼슬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왜군의 재침 정유재란

1596년 9월 강화교섭이 결렬되고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재차 조선침략을 결정하였다. 임진왜란의 연속이었다. 그간의 사정은 당시 통신사 황신이 보낸 밀계에 잘 나타나 있다. 황신이 고니시 유키나카 등과 함께 명나라 사신을 따라 들어가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보았는데, 그는 조금도 봉함(封函)을 받을 뜻이 없습니다. 명나라 사신이 조칙을 받들고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절하고 꿇어앉아 받으라고 하니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말하기를 “무릎 사이에 창(瘡)이 있어 절을 할 수가 없다.”하고 이내 사신을 구류하고 욕보일 마음이 있고, 신에게는 모욕이 더욱 심하고 오만불손한 말로 두 번이나 말하기를 “조선 너희가 네가지 큰 죄가 있으니, 왕자가 석방되어 간 뒤에 아직 와 사례를 하지 않고, 사신도 역시 벼슬이 낮은 사람으로 수만 채워서 들여보냈다. 너희 작은 나라가 전부터 나를 무시하여 세공을 바치지 아니하고 사신이 오지 않았다.” 운운하고 고니시 유키나가 등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조선에 오랫동안 있었어도 성공한 일이 없으면서 지금 화친을 약속하고 군사를 돌리고자 하는데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니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힘껏 만류하여도 안 됩니다”라는 내용에서 전쟁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가토오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카, 구로다 나가마사 등에게 침략 준비를 명하고, 이듬해 정유년인 1597년 2월 21일 침략을 위한 부서와 조선 남부 여러 성의 성주를 발표하였다. 이번에도 총병력 14만1천390명으로 된 대군이었다. 풍신수길의 재침의 목적은 강화조건에서 주장한대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즉 남부 4개 도의 강점에 있었다.<침략군 부대 편성은 별첨 표와 같다>

이때 조정에서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재침략을 예상하고 도체찰사 이원익, 도원수 권율을 경상도에 파견하고 군 병력 2만3천600명을 경상도와 전라도 요지에 배치하였다. 이 가운데는 호남군사 1만 명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조선군은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을 썼다. 왜군은 조선의 육군을 처음부터 상대로 보지 않았다. 이순신의 수군만 격파하면 종이 호랑이에 불과한 명군도 곧 도망갈 것이라고 보고, 전쟁은 그들의 뜻대로 끝날 것으로 믿었다. 그리하여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의 첩자 요시라를 경상좌병사 김응서의 진영으로 보내 고의로 허위정보를 흘리게 하였다. 요시라는 김응서의 진영으로 가서 고니시 유키나카는 가토 기요마사의 호전성 때문에 조선으로 나오게 되어 그를 몹시 미워하고 늘 욕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가토 기요마사가 한 척의 큰 배로 건너오다가 바다 가운데서 폭풍을 만나 작은 섬에 수일이나 머물러 있는데 내가 급히 이순신 통제사에게 연락하여도 이 통제사가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오지 않아서 일을 그르쳤다고 하였다.

이순신의 백의종군

김응서는 요시라의 이 말을 듣고 급히 영의정 윤두수의 측근에게 전하였다. 이 정보를 접수한 조정은 이순신에게 가토 기요마사를 바로 요격하라는 왕명을 내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 정보가 분명히 내해 작전에 능한 우리 함대를 외양으로 끌어내려는 흉계임을 간파하고 출격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초기부터 왜군 참모부가 꾸민 허위정보요 그들의 계략이었다.

요시라 말대로 가토 기요마사는 바다를 건너 서생포로 들어갔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조정에서는 왕명을 거역한 이순신의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반대파가 들고 일어섰다. 왕은 이순신을 압송케 하여 삭탈관직하고 투옥하였다. 그리고 전라병사 원균을 3도 수군통제사로 승진시키고 나주목사 이복남을 전라병사로 임명하였다. 남도 백성들은 한산도를 보루로 삼고 이순신을 간성으로 믿고 있다가 그가 파면되었음을 듣고는 기댈 데가 없어 서로 짐을 꾸렸다.

이순신은 여러 날 모진 고문 끝에 판중추부사 정탁의 임금께 진언으로 사형은 면하고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이순신이 통제사직에서 쫓겨난 후에 요시라는 또다시 김응서의 진영을 찾았다. 요시라는 김응서에게 한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강조하면서 기요마사의 후속부대가 또 바다를 건너온다고 흘리고 갔다.                               <계속>

박해현(초당대 겸임교수)·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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